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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디아블로를 시작했다(글 삐딱군)

 

***님께서 인생에 접속하셨습니다.

 

 

지난 5, 악마의 게임이라 불리는 디아블로3가 출시되었다. 수많은 잉여들이 오늘도 악마를 때려잡느라 엄청난 시간을 투자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껏 살면서 잘 한 짓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디아블로 시리즈에 손을 안 댄 것이었는데, 일주일 전 최종면접 불합격 소식을 듣고 멘붕한 나머지 악마의 유혹을 이기지 못 하고 던전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취업문예 등단을 위해 자소설을 집필하는 시간을 제외하고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며 광속렙업을 하던 중 문득 게임 같은 우리의 인생이 떠올랐다.








 

#Bgm : 이승환 아이에서 어른으로

“7살의 난 슈퍼맨인 것만 같다/지구인들이 이 사실을 알까 두렵다/14살의 난 어른이 되고 싶어 했다/자유, 사랑, 진리와 평화 이런 것이 어른들이 누리는 특권이라 생각했다/공부하란 얘기도 안 들을 테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인생은 RPG(롤플레잉 게임)과 닮았다. 게임 속에서 막과 장 사이에 던져진 퀘스트를 클리어하면서 한 단계씩 전진하는 방식이 우리의 삶과 크게 차이나 보이진 않는다. 간단하게 막 구성을 살펴보자.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부모라는 추종자의 엄호 아래 비교적 쉬운 1<유년기>를 클리어하고 나면 본격적인 게임이 시작된다. 그나마 1막은 다른 스테이지와 비교해 분홍빛이 감도는 편이다. 물론 분홍빛이 지속되는 기간이 짧아지고 있는 것 같지만 아직은 희망 속에서 이란 걸 꿀 수 있으니까.



 

#Bgm : 서태지와 아이들 교실 이데아

매일 아침 730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전국 9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썩 모두를 먹어 삼킨/이 시커먼 교실에서만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2<대입돌파>는 학벌이 공고한 한국 사회에서 향후 인생 진행의 방향을 상당 부분을 결정짓는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막이다. 2막에서 높은 업적을 달성하고 클리어한 경우 3<취업전쟁>의 진행이 한결 수월해진다. 단적으로 기업 인사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설문에서 채용 시 가장 많이 보는 비공개 커트라인인 나이에 이어서 학벌이 뒤를 이을 정도기 때문이다. 획일화된 진행방식에 대해 각계각층에서 비난의 목소리는 높지만 크게 봤을 때 변한 것은 없고, 결국 더 좋은 업적을 위한 유저와 그 서포터를 위해 기형적인 형태로 대입판이 변질되어 온 실정이다.

 



#Bgm : 이장혁 스무 살

밖으로 밖으로 눈부신 태양이 뜨고/안으로 안으로 날 비추던 그 햇살/밖으론 밖으론 난 아무렇지 않은 듯/안으론 안으론 하지만 난 울고 있었어/나는 울고 있었어 나는 울고 있었어

 



현재 나를 포함해 많은 잉여들이 <취업전쟁> 속 던전을 헤매고 있다. 2막과 달리 3막은 짙은 안개가 드리워져서 맵을 정확히 볼 수 없고 불확실한 정보만이 나돌고 있다. 예를 들면 기업 측의 정보에 따르면 스펙보다 스토리가 중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3막 유경험자들은 스펙은 기본, 스토리는 필수라고 말한다. 이런 불일치로 인한 혼란과 더불어 경기 침체라는 눈보라가 쏟아지는 상황은 유저들의 괴로움을 끌어내고 있다. 그래서 많은 유저들이 게임에서나 현실에서나 다음 막으로 가기 위한 충분한 스펙을 쌓기 위해 앵벌이에 나선다. 3막을 클리어하고 나면 4<결혼의 늪>이 기다린다. 이후에도 많은 퀘스트들이 기다리고 있겠지만 난 여전히 3막의 안개 속에서 정체 중이다. 그렇기에 손에 잡히지 않는 퀘스트에 대한 고민은 아예 접어두고 산다.

 



#Bgm : 청년실업 이 세상은 지옥이다

나는 오늘 가만누워 TV를 보다가/이 세상에 대해 깊이 고민을 해봤지/나와 함께 얘기를 해볼래? 진지하게 얘기를 해볼래?/이 세상은 지옥 지옥이다. !/이 세상은 지옥 지옥이다. !”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게임과 인생이 닮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게임이 인생보다 훨씬 나은 유저 환경을 제공한다. 게임은 난이도 선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대개 초, , 고급 정도로 나뉘는 게임의 레벨은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반면에 인생의 난이도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캐릭터 생성과 동시에 고정되곤 한다.(예를 들면 부모의 재력과 같은 가정환경) 또한 게임은 이른바 로드 신공을 통해 세이브-로드를 무한반복하며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낼 수 있지만 인생에서 한 번의 실패는 돌이킬 수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는 실패에 대한 완충작용 역할을 해줄 장치가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하면 끝인 그야말로 하드코어 모드.

 



#Bgm : 신해철 나에게 쓰는 편지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흐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이상 도움될 것이 없다 말한다/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 구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가끔씩은 불안한 맘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런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억지 같은 글을 계속 쓰다 보니 더 착잡해진다. 이 기분을 혼자 간직할 수 없으니, 현실에 맞춰 아등바등 살아보려는 청춘의 복잡한 머릿속에 돌멩이 하나 던지기, 풍덩! 인생의 매 스테이지마다 쓰러지지 않고 위해 버티고 있는 나를 포함한 수많은 캐릭터들에게 왜죠라는 메시지를 악랄하게 남겨보겠다. “자의건 타의건 간에 라는 물음이 거세된 채 맹목적으로 클리어만을 바라보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 끝에서 볼 엔딩은 어떤 것일까?”, “과연 행복은 무엇일까?” 머리가 복잡해지는 질문들,



사실 이런 물음도 이젠 조금은 지겨운 클리셰다. 책에는 나오지만 시험에는 나오지 않는 문제라서 딱히 공부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여기에 따라오는 허망한 예상답안 중 하나는 게임을 벗어나라는 주문이다. 시각을 조금만 바꿔도 세상은 크게 달라 보인다는 둥, 착실한 게임 공략법과 다르게 자신이 진정 원하는 적성을 찾고 그것에 대한 열망을 불태우며 살아야 한다는 둥. 이건 마치 밥 아저씨가 쓱싹쓱싹 그림, 참 쉽죠?’를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린다. 탈출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도 아니고 탈출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바로 열리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글쎄, 그걸 알면 내가 지금 이러고 안 살지(...)












※ 월간잉여 8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