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각잉각색

빚 권하는 사회(김경민)


 

꼭 잉여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어쩌다보니 잉여가 되었다. 안 해 본 것 없이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지만, 남은 건 빚뿐이다. 세상은 나를 계속 잉여라고 부를 것 같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 처음으로 대출이라는 단어와 마주했다. 첫 학기 등록금은 부모님이 마련해주셨고 다음 학기도, 그 다음 학기도, 아마 졸업할 때까지 등록금 정도는 지원해주시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 즈음, 부모님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하기 시작했다. 가세가 남들 보기 비참할 정도로 기울었다.

 

학자금 대출은 누구나 하는 거라고 생각했고, 지방 국립대였기 때문에 사립대에 비해 등록금도 많이 저렴한 편이어서 대출을 받는 것에 대해 별로 부담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대출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정부 학자금 대출은 거치 기간도 길었다. 또 대학 등록금까지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는 없다고도 생각했고. 뭐 그랬다. 그래서 그때부터 학자금 대출을 받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출을 받아서 1학년을 다녔다. 그리고 병역의 의무를 이행했다.

 

제대하고 보니 불행하게도 그동안 가세는 더 기울어 있었다. 아니 완전히 엎어져 있었다. 사업장이 경매로 넘어갔고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선산도, 땅도, 살고 있던 아파트도, 몇 대의 자동차도, 모두 경매로 넘어갔고 그 상황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던 아버지는 잠적인지 행방불명인지 어쨌든 뭔가를 하셨다.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압류 딱지를 붙이러 온 법원 직원은 부모님이 하시던 카센터의 단골손님이었다. 어머니는 불편하셨는지 자리를 비우셨다. 혼자 지키고 있던 집에 참 많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법원 직원께서는 보이지 않는 곳에 압류 딱지를 붙일 테니 걱정 말라고 하셨지만, 또 금방 해결될 것이라며 내 등을 오랫동안 두들겨 주셨지만, 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금방 해결될 것 같지도 않았다. 그 상황 자체가 참 많이 곤란하고 힘들었다.


하지만 계속 힘들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어머님 친구께서 도움을 주셔서 재래시장 초입의 상가로 이사를 했고 손재주가 있었던 어머니는 거기서 반찬가게를 시작하셨다. 급하게 설치한 조악한 파티션 뒤로는 내가 텔레비전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잠을 자고 있었고, 어머니는 날이 어두워지기 전까지 늘 반찬을 만들거나 팔고 계셨다. 이사 온 첫날 어머님은 반찬을 만드시다가 파티션 너머의 나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리셨는데, 지금도 어머님의 그 눈을, 그 눈물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내가 할 수 일은 학교를 열심히 다니는 것 밖에 없었다. 복학 후 남은 여섯 학기를 온전히 학자금 대출로 연명했고, 추가로 생활비도 대출 받았다. 정부 학자금 대출은 등록금 외에 생활비 명목으로 100만원을 더 빌릴 수 있었다.

 



영화 똥파리(2008)


어쨌든 2년여를 그렇게 살았다. 시장 생활은 녹록치만은 않았다. 옆에 포장마차가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 도시의 시장 사람들이 유난히 그런 것인지 일주일에 한번 정도는 경찰차를 볼 수 있었고 한 달에 한번 정도는 내가 직접 누군가를 신고하기도 했다. 그 즈음 상가의 월세도 오르고, 어머니도 반찬 가게를 계속 이어나가는 것을 많이 힘들어하셨다. 그렇게 나와 어머니는 시장 상가 생활 2년 만에 임대 아파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때 내 이름으로 두 번째 대출을 하게 되었다. 아파트 보증금 때문이었는데 학자금 대출과는 달리 절차가 많이 복잡했다. 등본을 떼고, 초본을 떼고, 재학 증명서도 떼고, 인감도 뗐었나. 어쨌든 그때도 나는 여전히 학생이었고 어머니는 자동차 세차를 하러 다니셨다. 인생의 절반 이상을 카센터 사모님으로, 카센터 협회 회장 사모님으로 사셨던 어머님이 세차 아줌마로 불리며 남의 카센터에서 세차를 하셨다. 가끔 알아보는 사람들 때문에 곤란하다고 하셨지만 그보다는 일이 고되서 더 힘들어하셨던 것 같다.

 

대학 졸업을 할 때 즈음 아버지가 돌아왔다. 많이 늙고 야윈 모습이었다. 그동안의 일은 묻고 싶지도 않았고 물을 수도 없었다. 그 시기에 어머니는 몸이 더 아프셨다. 어머니는 결국 일을 잠깐 쉬셨다. 아픈 어머니를 두고 집을 떠날 수 없었던 나는 학교 창업보육센터의 벤처기업에 일자리를 구했다. 그곳은 내가 복학 후 1년 정도를 학업과 병행하며 벤처기업 창립에 도움을 주었던 곳이었다. 쉽게 말해 나는 그 기업의 창립 멤버였다. 하지만 한번 그만뒀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 후에 몇 번이나 다시 일하자고 했을 때 거절했던 것 때문인지, 나를 보는 사람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다. 그건 사장이자 선배였던 형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결국 며칠 만에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 뒤로 한달 동안을 그냥 놀았다. 그러다 졸업식을 며칠 앞두고 학과 교수님께 전화를 받았다. 조교 인턴을 해달라는 전화였다. 학교 취업률을 높이기 위해 미취업 졸업생들에게 몇 개월간 월급도 주며 취업 준비도 하게끔 해주는 그런 이상한 자리였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학과 취업률을 낮추는 존재가 되었다는 사실이 너무 비참했다. 계속 거절했다. 하지만 근처에 사는 미취업 졸업생이 나 밖에 없다는 말에, 또 한 달에 백만 원이나 준다는 말에, 나는 마지못해 수락을 했다. 그래야만 했다. 자존심 때문에, 열등감 때문에 마냥 놀고먹을 수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개월의 계약 기간 중 처음 한 달만 성실히 나갔을 뿐, 나머지 세 달은 며칠에 한 번씩 얼굴만 겨우 비췄다. 후배였던 조교도 불편해했고, 연구실 후배들도 많이 불편해했다. 하지만 제일 불편한건 나였다. 초라한 내가 너무 괴로웠다. 그 괴로움이 견딜 수 없이 불편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대기업에 꼭 가고 싶었다. 꼭 가야만 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서류 전형을 통과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중소기업들도 마찬가지였다. 박봉을 받으며 서울로 가느니 살고 있는 곳에서 취직을 하고 싶었는데 여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공교로운 일이었다.

 

꿈과 희망, 이상과 현실, 나와 가족. 모두를 생각하며 고민을 했지만 어느 하나 쉽게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길이 창업이었다. 스스로 즐거울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나는 자신했다. 나를 믿어주는 후배들도 많은 힘이 됐다.

 

그래서 대출을 받았다. 내 이름으로 받는 세 번째 대출이었다. 담보도 없고 신용등급도 별로였던 나는 아이디어만으로 대출을 받아야 했는데 그 길이 쉽지만은 않았다. 크리스마스를 전후로 사업자를 등록하고 사무실을 겨우 구했다. 후배들을 불러 모았고 고사도 지냈다. 대출 승인이 났는데 오백만원이었다. 사무실 월세에 난방비에 각종 요금만 해도 한 달에 백만 원 정도가 나가는 것을 생각하면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돈이었다. 하지만 열심히 했다.

 

겨울과 봄을 지나면서 이것저것 안 해본 일이 없었지만 수입은 거의 없었다. 그 사이에 후배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붙잡을 수 없었다. 나를 포함해 일곱 명이나 있었던 작은 사무실은 봄을 지나면서 세 명 밖에 남지 않았고, 그 마저도 여름이 끝날 무렵 한명이 더 그만두면서, 결국 나와 개발자 한명 밖에 남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때부터 일이 풀리기 시작했고 성과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대회에서 수상도 했다. 그리고 두 달 후 거짓말처럼 사무실은 문을 닫았다. 마지막으로 남은 후배마저도 더 이상 버티기 힘들어했기 때문이다. 그 후배가 그만두겠다고 하자 나는 그길로 바로 사무실 문을 닫았다. 서서히 성과가 나고 있었던 시점이라 후배에게 많이 서운했지만, 그래도 표현할 수는 없었다. 내 명의의 빚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사무실 문을 닫고 한 달이 지났을까. 그때까지도 폐업의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던 나에게,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후배가 전화를 걸어왔다. 그 후배는 그동안의 몫을 요구했다. 회사에 들인 돈은 전부 내 돈이었음은 물론이고, 심지어 나는 빚더미에 앉은 상태였다. 함께 일하는 동안 나는 그 후배에게 한 푼이라도 더 주려고 노력했다. 카드 값이 연체되어가면서도 그 친구에게 소주 한잔 사주려고 노력했고 몇 천원의 경비도 그 친구에게 쓰게 한 적이 없었다. 얼마의 돈이 생길 때마

다 항상 나보다도 더 그 후배를 챙겨줬다. 급하게 카드 명세서와 통장 입출금내역 확인해가면서 그 후배에게 해명을 해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배는 아쉬워했고 분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 후배에게 나는, 내가 취직을 하면 얼마를 더 줄 테니 기다려 달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서야 후배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나는 후배가 떠난 후에도 그 자리에 한참을 더 앉아있었다.

 



영화 작전(2009)



황망했다. 13개월의 사업 기간 동안 그 후배가 나를 한 순간도 믿지 않았다는 것이 슬펐고,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했다. 그 전에 알고 지낸 몇 년도 그랬을까. 그렇게 나를 따르던 후배가 왜 그랬을까.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먹먹하다.

 

사무실을 정리하고 세금과 요금들을 모두 정리하는데 몇 달이 더 걸렸다. 다시 직장을 구해야 했는데 신입이라고 하기엔 나는 나이가 좀 많았고 경력이라고 하기엔 이렇다 할 경력이 없었다. 사무실에서 기획자로써 일하긴 했지만 기획 일을 배운 적이 없어서 주먹구구식으로 처리한 것이 대부분이라 그 흔한 포트폴리오조차 만들 수 없었다. 토익 점수도, 그 흔한 자격증도, 나는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예전에 다녔던 벤처기업으로 가서 일을 처음부터 배웠다. 사장 형이 기획자 따위는 필요 없다고 해서 십년 만에 프로그래밍을 배웠고, 공부하는 것을 보고 채용하겠다는 이상한 약속도 받았다. 깊은 절망에 빠져있던 나는 그때, 가릴 것이 없었다. 나를 채용만 해주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 보름이 지나도록 계약 이야기는 없었고 그동안 내게 과제를 계속 내주는 방식으로 나를 체크했었는데 어느 시점부터는 과제도 내주지 않았다. 주어진 일이나 과제가 없으니 하루 종일 가만히 모니터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가는데도 아무도 내게 계약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먼저 회사 선배들에게 계약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선배들은 계속 난색을 표하거나 잘 모르겠다며 답을 피했다. 며칠을 더 망설이다가 사장 형에게 직접 계약이야기를 꺼내니 사장 형은 마지못한 표정과 말투로 그래 그럼 계약 하던가 하자면서 이상한 답변을 해줬다.

 

한 달 보름동안 나는, 담배를 같이 피우지 않는다며 혼이 났고, 퇴근 후에 남아서 같이 게임을 하지 않고 집에 먼저 간다고 꾸중을 들었고, 먼지와 거미줄이 가득한 책상에 작은 프로그램 하나 구동하기 힘든 구형 노트북 하나 던져주면서 공부하라고 했을 때도 아무 말하지 않았고, 테스트 장비조차 주지 않았을 때도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사장형의 계약 하던가 하자는 말은 많이 슬펐다. 내가 도대체 뭘 그렇게 잘못을 한 것일까. 나는 과제도 해야 했고 게임도 즐기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 시간이 되면 과제를 하느라 공부를 하느라 집에 일찍 갔다. 10인치 구형 노트북이지만 별다른 불만도 하지 않았다. 컴파일 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려도 단 한마디의 불평도 하지 않았다. 그냥 기다렸다. 테스트 장비도 집에서 직접 가져왔다. 보급형이라 화면도 작고 속도도 느렸지만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뭘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내가 그렇게 아꼈던 후배는 나를 단 한 순간도 믿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따랐던 선배는 왜 내가 그렇게도 미운건지. 나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구직 활동을 하기 위해 또 돈이 필요했다. 미취업자에 기존 대출 등으로 인해 신용등급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1금융권의 문을 두드려보고 제2금융권, 하다못해 제3금융권까지, 문이란 문은 다 두들겨 보았다. 하지만 어디도 내게 돈을 빌려주지 않았고 겨우 찾은 사금융업체에서 내게 겨우 50만원을 빌려주었다. 겨우 50만원을.

 

신은 인간이 수반할 수 있을 만큼의 고통만 주신다고 했던가. 금융권에서도 그 말은 똑같이 적용된다. 금융업체들은 인간이 갚을 수 있을 만큼의 돈만 대출해주신다. 몇 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몇 억을 빌려주고, 나 같은 무직장, 무보증, 무담보에게는 50만원만 빌려준다. 슬프지만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나는 이제 18개월간 50만원과 39%의 연이자를 상환해야 한다. 더 큰 금액의 다른 대출금들도 많다. 물론 나는 어떻게든 살아갈 것이고 어떻게든 대출금을 갚아나가려고 노력하겠지만, 살아가면서 얼마의 대출을 더 해야 하는지, 살아나갈 동안 대출금을 모두 다 갚을 수는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모두 내가 빌린 돈이지만. 누구의 탓도 할 수 없겠지만. 나는 정말 잘 모르겠다.



 

 

 




※ 월간잉여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