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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나의 2직사(김송희)

잦은 이직은 절대 자랑이 아니다. 더군다나 직장에 대한 충성도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국 사회에서는 더욱. 그런데 나는 이미 이 이야기를 동네방네 너무 많이 하고 다녔다. 그래서 안 할라고 했는데… 진짜 안 할라고 했는데…  잉집장님의 강요로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고 다시는 내 지난한 이직의 역사 따위는 언급 안 할란다.  (잉집장님 나빠요!)

이제 어느 정도 경력이 있는 나는, 면접을 보러 가서 “살면서 힘들었던 일을 이겨낸 경험은 무엇인가?” “사람들과 협동해서 성취감을 느낀 것은 무엇인가” 따위의 질문은 듣지 않는다. 대신 모든 면접관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직이 잦은데, 이유가 뭔가” 그러면 나는 불안한 눈빛으로 전쟁 같은 과거를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진 못하고 그냥 고개 푹 숙이고 얼굴부터 빨개진다. 이건 나의 아킬레스다. 면접 보러 가서 이전 회사 욕하는 게 제일 바보 같은 짓이라고 <면접의 달인> 책에서 조언했으니, 뭐라고 말은 못하겠고 “이게 다 궁둥이 가벼운 제 탓이지요” 하기에는 억울하고. 하여간 참 복잡한 심정이 된다.

이런 질문을 들으면 어떻게 해요? 라고 선배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항상 현명한 답을 내주던 선배가 말했다. “그냥, 다닌 회사들은 많지만 그때마다 항상 최선을 다했다고 해.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쩌겠어.” 좀 빤하고 관습적이긴 하지만, 다른 답은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진실이었다. 나는 어쨌든 부끄럽지 않을 만큼 열심히는 했다.
 


이직의 이유?
이제와 이직의 이유들을 찾으려 하니, 찾을 필요도 없이 너무 눈에 보여서 부끄럽다. 어느 회사는 월급이 너무 적었고(롯데리아에서 일하는 내 동생 시급이 더 높았다), 또 어디는 야근이 너무 많았으며(정시 퇴근할 때에는 ‘죄송합니다’라고 말하고 나가야했다), 또 다른 곳은 대표가 쓰레기(그 쓰레기 오빠 아님, 레알 인격적 쓰레기)였다. 그때마다 너무나 절박한 심정으로 ‘탈출’하듯 회사를 그만뒀지만, 면접에서 “이직이 잦네?”라는 질문을 들을 때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았어야 했나 싶어진다.

나의 첫 직장은 방송연예웹진이었다. 당시 잘 나가던 ‘텐아시아’를 좇아 만든 웹진이었고, TV광이던 나에게 그만큼 좋은 직장이 없었다. 매일 TV를 보고 리뷰를 쓰면 월급이 나온다니! 연예인 인터뷰를 할 수 있다니! 정규직 전환을 약속받고 시작한 계약직이었다. 계약서에는 ‘상근 프리랜서’라고 쓰여 있었는데, 프리랜서인데 프리하지 않다는, 매일 출근하는 프리랜서라는 말이었다. 보통 계약직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회사와 개인이 일대일로 계약하는 계약직, 이 경우에는 2년이 지나면 정규직으로 취직을 시키던지, 잘라야 한다.

그래서 법망을 피해 생긴 계약직이 중간에 파견회사를 끼고 하는 파견 계약직, 그리고 4대 보험 적용이 아예 안 되는 나와 같은 상근 프리랜서 계약직이 있다. 프리랜서 계약직은 회사 입장에서는 써먹기  편리한 인종이었다. 4대 보험 적용도 필요 없지 2년이 지나도 필요하다면 계속 써먹을 수 있지, 퇴직금도 줄 필요 없지, 월급을 떼먹혀도 노동부의 보호도 받을 수 없다. 계약서 하단에는 ‘회사에 손해를 끼칠 경우에는 개인이 전부 책임을 져야한다’는 조항도 있었다(당시에는 그냥 직장이 생긴다는 기쁨에 사인부터 하느라 제대로 보지도 않았었다). 조항을 더 추가하고 싶으면, 갑님이 맘껏 더 추가할 수도 있었다.

당시에는 이 모든 게 불합리하다는 생각도 못했다. 그저 나에게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꿀직장’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글을 쓸 수 있었고, 경력을 쌓으면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있었다. 무엇보다 일이 재미있었고, 더 잘하고 싶어서 불만을 품을 여유도 없었다. 매일 ‘일’생각만 했다. 다음에는 어떤 기사를 쓰면 좋을까, 이번에는 어떤 사람을 섭외하지? 내부에 기자가 3명밖에 없어서 일당백을 해야 했고 나는 이런 저런 잡일도 해야 하는 막내였다. 그 와중에 팀장이나 선배가 "잘 했네" 지나가듯 칭찬 한마디 던지면 그게 그렇게 신이 났다. 가요, 드라마, 패션, 예능… 닥치는 대로 섭외하고 썼다. 각종 시상식이 몰려있는 연말에는 혼자 17개의 시상식을 돌았다.(한국에 시상식이 그렇게 많은지 그때 처음 알았다. 젠장. 얼마나 힘들었던지, ‘제 1회 멜론 뮤직 어워드’에 다녀와서 쓴 기사 제목은 이랬다. “멜론 어워드, 2회도 열릴 필요 있을까?”)

그렇게 열심히 한 첫 직장에서는 1년 만에 잘렸다. 그러니, 이 때는 자의로 이직한 게 아닌 셈이다. 그 회사는 방송국 계열사였기 때문에 내가 다니는 1년 동안에만 사장이 2명이나 바뀌었는데, MB라인의 대표가 와서 이전 사장이 하던 벌인 사업인 ‘웹진’을 문닫으라고 명하셨기 때문이었다. 당일에 해고통보를 받고 매점에 가서 박스를 구해 짐을 꾸렸다. 짐이 너무 많아서 집에 다 들고 갈 수 없었다. 회사에 남은 선배가 택배로 붙여주마 했고, 점심에는 팀장님이 ‘빕스’에 데려가 밥을 사줬다. "너 먹고 싶은 거 다사주겠노라"고 했는데, 빕스 말고는 아는 데가 없었다. 누구도 나에게 미안하다고는 말하지 않았고 눈물도 나오지 않았는데, 다음 날 도착한 택배 박스를 열다가 울었다. 프리랜서 계약직이라 실업급여도 없었고, 퇴직금도 없었다. 조금 놀다가 나는 홍보 회사로 이직했다. 재미있게 일했는데도, 왜인지 이제 연예부 기자라면 지긋지긋했다. 











홍보 회사에서는 드라마를 하나 통으로 맡고 있던 팀장이 그만두는 통에 그 자리에 사원인 내가 들어갔다. 왜 그런지 모든 직원이 3개월은 인턴 월급을 받아야 한다고 했고, 대표는 면접 볼 때부터 어떤 직원은 유학을 가서 그만두고, 어떤 직원은 자기가 유명 작가의 서브 작가로 꽂아줬다고 자랑부터 했다.  방송 작가가 꿈도 아니었고, 유학갈 생각도 없었지만 왠지 좋은 회사처럼 느껴졌다.



알고 보니 그 여자 대표는 너무 무서운 사람이었다. 깡패들과도 연계되었다는 소문이 있었는데, 그보다 더 무서웠던 건 시도 때도 없이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목소리 크게 일하는 게 ‘화끈하고 멋지게’ 일하는 커리어 우먼의 자세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출근 3일째부터 혼자 비행기를 타고 김해로 출장을 다녀야 했는데, 출장 가서 쓰는 돈은 전부 내 돈으로 처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망가고 싶었는데, 뭐라고 변명을 하면 좋을지 머리가 아팠다. 왠지 저 여자에게 잘못 보이면 다시는 이 바닥에서 일하기 힘들 것 같았다. 은근히 자신의 파워가 어떤 줄 아느냐, 나에게 잘못 보여서 다시는 일 못한 사람도 있다는 둥의 말을 하기도 했다. 무서웠다. 이혼한 며느리의 개가한 시집에 전화해서 ‘그 년이 우리 집에서 어땠는줄 아냐’고 욕을 한 사발 늘어놓을 시어머니 같은 사람… 절대 폐는 주지 말고 퇴직하자고 다짐했다. 드라마 끝나기만을 기다렸다가 야근까지 하면서 일처리를 완벽히 해두고 퇴직했다.





더 말해서 뭐해….
그 다음, 그 다음의 다음 회사들까지 늘어놓자니 왠지 구차하다. 대부분 이런 비슷한 패턴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회사에 대해 말하면 다들 턱을 못 다물고 "거짓말 마"라고 하는 회사들의 반복이었다. 대기업이 아니고서야 소규모 방송, 언론계열은 다 비슷비슷했다. 열악했고, 업무량은 많았고 ‘너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일 하니까 월급 적어도 돼’라고 모든 대표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다음 회사들에 대해서 말하려면 연재소설로 풀어도 모자랄 정도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 보면 그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1년 몇 개월을 구차하게 참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가차 없이 판단하고 뛰쳐나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놓지 못하는 동료들도 있었다. 지금 ‘참았던 사람’과 ‘참지 못하고 그만뒀던 나’ 중에서 누가 더 잘됐냐…하면 다 대동소이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잦은 이직은 절대 자랑할 거리가 못된다. 그런데 왜 그런지 잘 모르겠다. 그럼 쌍욕을 듣고, 희롱을 당하고, 월급이 밀려도 참아내면 자랑할 거리가 되는 걸까. 우리가 참아내야 하거나, 절대 참아서는 안 되는 것의 기준은 무엇일까. 나이에 비해 그렇게 많은 회사들을 겪었지만 지금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도 "이직이 잦았던 이유가 뭡니까"라고 누가 물어보면 "아, 네…그러니까요…." 답이 궁해진다.



이직이 잦았던 이유는 더 나은 곳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 아닐까. "어차피 회사 다 거기서 거기야"라고 생각하고 포기했으면 좀 더 편했을지 모르는데, 회사가 다 거기서 거기는 아닐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직이나 퇴직을 고민하는 분에게 해줄 말은… 음… 그러니까…. 못 참겠으면 때려 칩시다, 라는 무책임한 말을 해본다. 지금 당신이 못 참겠는 ‘그것’보다 더 한 회사는 아마 없을 거라니까요? ‘그것’과는 다른 ‘저것’이 있겠지만요.











(격)월간잉여 15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