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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잉각색

‘평일 낮’이라는 감정문화(김신식)


 

인간이 느끼는 시간은 거짓이다.

그것은 시간 자체가 아니라 시간을 느끼는 우리의 느낌일 뿐이다.”

-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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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시간만큼 잉여를 애잔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없으리라. 간혹 섬세한 잉여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말들의 저의를 시간에 초점을 맞춰 짐작한다. ‘오후 세시에 걸려온 전화, 가라앉은 목소리로 통화를 시작하면 ……쉬고 있는데 미안해요같은 배려에는 자고 있을 시간은 아닌데, 팔자 좋구나같은 꿍꿍이가 있진 않을까란 의구심이 스며드는 것이다. 잉여가 될수록 시간은 점점 하나하나의 느낌으로 정리된다. 내게 다가올 (대부분 따가운) 반응이 예상되고 혼자만의 대화는 늘어간다. 행동은 정작 일어나지 않았는데 공상은 풍부해진다.


그렇다고 위에서 인용한불안의 서속 페소아의 시선 때문에 우리에게 24시간-표준시의 현실을 마련한 샌포드 플레밍의 노고를 간과하진 말자. 어찌 보면 시간이 하나의 느낌인 건 천차만별이었던 곳곳의 시로 구성된 세계를 24개의 표준면 안에 집어넣길 원했던 그의 수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24개의 면 속에서 사람들은 각기 다른 행동을 벌인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로의 행동을 관찰하며 행동한 나와 행동하지 않는 너, (더 노골적으로) 노동한 나와 노동하지 않는 너를 짐작해보기도 한다. 실은 플레밍의 노고 가운데 잉여에게 상처를 덜 주는 형태란 지금 거기는 몇 시니? 잘 시간인가?” 하는 질문을 비교적 안정되게 해볼 수 있는 정도다. 내가 있는 나라와 당신이 있는 나라의 시차를 헤아려보는 것 안에서 잉여의 스트레스인 이 시간에 넌 뭐 하니?”가 끼어들 경우는 그리 없기 때문이다.


수많은 이의 분석을 길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잉여를 진하게 규정하는 특성인 -쓸모를 둘러싼 시차는 직장이란 물리적·심리적 공간으로 인해 분명해진다. 이를 더욱 부추기는 시간은 바로 평일 낮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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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유형의 직장을 다니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직장인들은 그 누구나 한 번쯤 자신이 적극적으로 회사의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녔구나 생각해봤을 것이다(그것을 격무라 부르든 야근이라 부르든 암튼). 그래도 대개 한 건물 안을 벗어나는 경우는 그다지 없다. 자신의 사무실 책상 위 컴퓨터를 통해 굳이 나가지 않아도 온 세계의 활동을 알 수 있다손 치더라도, 정작 평일 낮을 누리고 있는 이들의 활동성은 가족과의 주말 장보기 과정에서나 가늠될 뿐이다. 흡연은 관찰의 시간을 허락하지만, 평일 낮의 특성을 세밀히 파악하기엔 이 시간은 자신과의 대화나 동료와의 의미 없는 말들을 주고받는 데 쏠려 있다. 외근이라는 방식 또한 평일 낮의 특성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있다. 가령 출판계에서 교정교열에 붙들려 있는 편집자, 뜨거운 열기를 뿜어대는 모니터와 고투하는 북디자이너들이 저 외근 나갑니다하는 마케터의 인사에 부러움을 표하기도 하지만, 결국 마케터 또한 어느 한정된 공간에 붙들려 누군가를 만나고 있을 뿐이다.


평일 낮이 이렇게 좋았구나 하는 마음이 내가 이 시간에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마음과 겹쳐 나타나는 것, 이는 평일 낮의 활발한 한적함에 기인한다. 그리고 이런 활발한 한적함을 제대로 관찰, 확인하기 위한 시작점은 집일 것이다.


오전 아홉시 너머 들리는 소리의 출처란 밤에 꺼놓고 잔다는 걸 잊은 채 돌아가는 선풍기,새 오피스텔 건축과 함께 쌓여가는 인부들의 욕설, 건물 청소부의 세찬 물걸레질. 무심코 튼 텔레비전에서 아줌마 방청객들의 ~’ 하는 리액션을 접한다는 것은 평일 낮 관찰기의 출발을 알린다. 뒤이어 동그라미와 깨알 같은 글씨가 가미된 달력 속 일정을 보면서 새삼 이 시간의 무수한 의미들은 결국 결심으로 수렴되는 건가 혼자 심오해졌다가도, 계획이란 깨지라고 있는 것 같은 이제는 드라마 대사에서나 더 정겨운 독백으로 엑스를 긋는다.


모처럼의 외출. ‘나보다 더 상전이네하는 표정으로 유모차를 앞뒤로 흔드는 어머니, 유치원 버스를 세워놓고 아이스크림을 물며 담소를 나누는 기사들, “계세요? 계세요?” ‘안에 분명 있는 것 아는데 왜 안 나오냐는 짜증이 섞인 채 문을 두드리는 듯한 택배기사, ‘저 손님 안 왔으면 계속 잘 뻔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쓰여 있는 것 같은 카페 사장님까지. 무기력보단 기운이 있되 활력까진 아닌, 이 낮을 꾸려가는 사람들.


평일 낮의 활발한 한적함을 만끽하는 는 예상치 않은 접촉으로 잠시 혼미해지기도 한다. 여기에는 돌아보면 당연한 타인의 행위를 지레짐작하고픈 유혹이 물론 겹쳐 있다. 근황에 대한 질문은 휴식을 빼앗는 것 같다. 낮잠과 그 흔적들은(앞에서 언급했던 전화상 가라앉은 목소리 등) 사회적 태만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한때 직장인이란 표지였던 가게에서의 현금영수증 인출을 단골 마트 직원이 여느 때처럼 잘해주다가 점점 그러지 않으면 아 이젠 내가 실업자인 줄 알아챘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런 심리적 풍경 역시 평일 낮의 한적한 활발함을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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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을 누린다는 것에 대한 사회적 시선을 느낄 수 있는 또 다른 공간은 온라인이다. 인기 있는 스포츠 경기가 평일 새벽에 중계될 경우, “여러분 오늘 밤 새실 건가요?”라는 질문에는 유형화된 댓글이 달린다(특히 월요일새벽). “저 이 게임 보려고 연차 냈어요라는 댓글에는 아 부럽다라는 보이지 않는 댓글이 달려 있을지 모른다. 여기에 투사된 부러움은 연차라는 용어가 익숙한 직장인들만의 마음보단 백수라는 처지에 갑자기 쪼그라드는 마음과 더 가까울 것이다. 심지어 월급 도둑이란 표현도 그러하다. 평일 낮에 치러지는 류현진의 야구 중계를 컴퓨터로 보는 사람들의 어마어마한 수치를 보고선 누군가 이 월급도둑들!”이란 표현을 쓴다. 순진한(?) 직장인들은 이 우스갯소리의 의도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러는 당신은~!” 하며 타박하기도 하지만, 이런 싸움에 백수인 는 부럽다. 그리고 함께 따라오는 자괴감. 여기까진 그래도 평일 낮을 누린다는 것에 대한 어떤 암묵적인 에티켓 같은 것이 있다. 우리 분명하게 이 시간대에 활발하게 글 올리는 사람들을 백수라 부르진 말자고. 아니 그 정체를 묻지 말자고. 허나 이 에티켓을 깨는 질문이 가끔 진지하게 올라오면 사람들은 예민해진다. “이 사이트는 주 연령층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보고선 혹자는 질문자에게 속이 뻔히 보인다고 투덜댈 수도 있을 것이다. 드디어 그런데 지금 이 시간에 엄청나게 글 올리는 분들은 뭐 하시는 분들이죠?”란 선명한 질문이 등장하고 직장 없는 백수들이 대부분이죠 뭐하는 댓글에 싸움은 시작된다.


이 싸움에서 열외 대상 중 하나는 대학생·대학원생이다. 대학이란 분명한 장소성, 집과 집이 아닌 곳을 왔다갔다 한다는 분명한 의례, 대학생에겐 아직 그 나이 정도면……으로 대변되는 정서적 유예, 대학원생에겐 학부 시절에 충분히 보장받았을 그 정서적 유예가 지난 사람을 향한 질타가 아슬아슬하게 감춰진 심리. 이것들이 복잡하게 얽혀 하나의 무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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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일 낮은 마치 하위문화를 규정할 때 쓰이는 파격적인 복식이나 표현과는 거리가 있다. 한적하고 온전하기까지 한 이 시간의 감정 문화는 아직까지 하위문화의 또 다른 존재 양식이라고 할 수 있는 문화부족의 탄생으로 이어지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 감정 문화는 자기 자신과의 대면을 중요시한다. daydream, 우리말로 흔히 백일몽이라 부르는 꿈의 의미를 영어와 빗대어보면서 왜 낮에 꾸는 꿈은 공상 정도로 치부되어야 하지? 밤에 꾸는 꿈만 제대로 된 거라는 법 있나? 이런 애꿎은(?) 투덜거림은 좋은 준비물이 될 것이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평일 낮을 채우는 활발한 한적함은 한적하다는 느낌에서 오는 온기만이 그득한 정서는 아니다. 우리 시대를 오랫동안 지배해온 노동 윤리와 늘 긴장 관계를 갖고 있다. 쓸모와 비-쓸모라는 심리적 경계가 내 안에 자리 잡은 채 신경증적인 주체로 나를 잡아끈다. 이것이 하나의 성찰로 나아갈 것인가? 혹은 자학으로 떨어질 것인가? 그 윤곽은 사실 모호하다. 평일 낮, 나를 돌아봄으로써 찾아오는 기운에 환멸과 자책은 슬그머니 따라오기 때문이다. 자신도 모르게 동원되는 타인을 향한 과해석은 이 감정의 동원을 돕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일 낮은 잉여만이 지닌 나름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시간의 감정문화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걸어본다. 단순히 이직을 위한 물리적·정서적 에너지의 보충 기간이 아닌, 그간 조명받지 못한 생산의 다양한 의미를 일깨워보는 작업, 우리 시대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있는 노동에 대한 지배규범을 거스르는 새로운 서사의 구축 등을.


다만 평일 낮이 잉여를 위한 유의미한 작업이 되려면 일상의 모든 것을 소중히같은 온기 가득 찬 윤리적 아포리즘에 안주해선 안 될 것이다. 우리는 그간 감수성으로 흩뿌려진 낮과 밤의 기록들에 너무나 지쳐왔지 않았는가. 낮과 밤은 지극히 사회적 현실이며 우리는 오늘도 나름의 쟁투를 벌이고 있기에.

 


김신식 내성적인 사람들을 위한 사회학을 연구 중인 사회학도. 트위터 @jjcrowekr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