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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인 병실 잉여 생존법(오리온)

본잉은 유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주기적으로 수술을 받고 회복이 되기까지 약 2개월 동안 6인 병실에서의 생활을 견뎌야 했다. 스마트폰도 태블릿 PC도 없는 시절이었다. 같은 또래의 환자와 함께 입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지루했다. 시간을 낭비한다는 불안감, 답답함 때문에 힘들 때가 많았다. 텔레비전, 잉여가 아닌 인간, 링거, 침대 덕분에 버텨낼 수 있다. 이제부터 6인 병실에서 잉여 환자로 생활하는 방법에 대해 기록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병원에서 지루함에 맞서 싸우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 그런 일이 없어야겠지만 6인 병실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생길 때를 대비하여 신체 건장한 잉여들도 읽어두길 청한다.

 


1. 텔레비전

텔레비전은 오전을 책임진다. 아침드라마는 같은 시간대에 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피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방송사 채널을 돌려가며 아침드라마를 보다보면 적어도 오전 10시까지는 지루함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 아침드라마가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회진이 시작되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아침드라마 자체가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침드라마 등장인물, 전개로 인해 다른 잉여 환자들이 넣는 추임새가 생존에 도움을 준다. 평일에 아침드라마들을 죽 연이어 보는 것이 피로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온 병실 사람들이 거기에 집중해 있을 때 혼자서만 다른 행동을 하거나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서는 안 된다.

 

원래 병원 텔레비전에는 동전을 넣어야 했다. 보호자들이 돌아가면서 동전을 넣는 일이 대부분이다. 어린 잉여를 어여삐 여겨 한 번에 동전 여러 개를 넣어주는 자비를 베푸는 어른 잉여도 있었다. 텔레비전이 제대로 안 나와서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생존확률이 낮아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동전을 너무 많이 넣으면 자정이 넘도록 텔레비전이 꺼지지 않아서 소리를 최대한 낮추고 텔레비전 불빛을 견뎌야 하는 일도 있었다. 정확히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병원에서 동전투입식 텔레비전이 사라져 생존이 손쉬워진 것은 혁명이었다. 병원에서 텔레비전은 바보상자가 아니다. 감사함을 느끼자.

 


2. 잉여가 아닌 인간

같이 6인 병실에서 생활하는 잉여들은 사실 생존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서로 24시간을 함께 하기에 대화 소재도 이미 고갈되었고 가스 배출, 잠꼬대나 코고는 소리 등의 요인으로 인해 서로 묘하게 불편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지루함을 달래주는 건 병실 잉여가 아닌 이들이다. 그래서 방문객이 오면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을 수 있다. 그저 가만히 앉아서 손님을 맞이했을 뿐인데도 뿌듯하다. 방문객은 옆에 있는 환자 잉여들의 생존에도 도움이 된다. 방문객과 그를 맞이하는 잉여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는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방문객이 떠난 후에 그와 어떤 사이인지,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질의응답 시간이 이어진다. , 여러 명의 방문객이 한 환자 잉여에게 단체로 찾아오거나 여러 환자 잉여에게 방문객이 비슷한 시간대에 찾아오는 것은 생존을 위협한다. 이곳은 6인 병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병원에서 잉여가 아닌 사람들 즉 간호사, 의사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이들 중 친절하거나 매력 있는 사람이 있으면 생존 확률이 조금 올라간다. 하지만 그러한 의료진을 만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네가 4시에 온다면 나는 세시부터 행복해질 거야.’라고 말한 어린왕자와 같은 마음으로 잉여들은 의료진을 기다린다. 하지만 정작 의료진이 오면 왜 기다렸나 후회하는 일이 다반사다. 환자 잉여를 무미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대하는 의료진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3. 링거

이제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링거를 이용해 살아남는 방법을 살펴보자. 링거액 방울이 어떻게 떨어지는지 바라보자. 링거액을 빠른 속도로 떨어뜨려 혈관이 시원해지는 기분을 만끽하거나 느리게 떨어지도록 조절하여 슬로우 비디오를 찍는다고 생각해 보자. 링거액이 떨어지는 것을 보는 것을 보는 것도 지겨워진 다음에는 링거액이 줄어드는 걸 보기 바란다. 난이도는 링거액이 반 병 정도 남았을 때부터 시작하는 것이 적당하다. 링거액이 팔 혹은 손등 안까지 전달되는 길에 기포가 생기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기포를 검지, 엄지로 튕겨서 링거 병 쪽으로 서서히 올려보자. 이 글을 보고 이해가 잘 되지 않으면 기포가 생겼을 때 간호사가 와서 하는 동작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된다. 기호가 서서히 밀려 올라가 관 밖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며 성취감을 느껴보자. 링거 병을 흔들었다가 언제 멈추는지 보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기를 바란다.

 


4. 침대와 천장

그나마 링거가 있는 시절이 행복하다. 텔레비전도, 다른 인간도 다 지겨운 순간, 링거도 더 이상 생존에 별 도움을 주지 않는 사태에 이르렀거나 링거 주사를 제거한 상황, 남은 것은 침대와 자신의 몸 하나 뿐일 때가 제일 힘겨운 순간이다. 천장을 보며 무늬를 관찰하거나 금이 간 부분을 발견해 보자. 머리를 안 감고 또는 세수를 하지 않고 며칠, 몇 시간까지 견딜 수 있을까,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는 것도 좋다. 또는 침대에 누워 있던 것과 반대 방향으로 누워보는 것도 좋다. 머리가 있던 곳에 발을 두고 발이 있던 곳에 머리를 눕히는 것은 생각보다 효과가 크다.

 


순이는 밤에도 자는 것 같지 않았다. 밤낮없이 누워서 신음 소리만을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신음 소리를 내기 위해 장치한 기계와도 같았다. 동주는 종내 어느 날 순이에게 물어보았다. "너 어째서 그렇게 밤낮 신음 소리를 지르니? 그렇게 죽어오게 아프냐?" 순이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럼 어떻게 해요. 그냥은 심심해서 못 견디겠는걸." 그때부터 동주는 무겁고 암담한 순이의 신음 소리를 아껴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 신음 소리는 머지않아 죽을지도 모르는 순이의 최선을 다한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 손창섭,잉여인간, 민음사, 2005,

 


손창섭의 단편 생활적을 읽고 나서야 깨달았다. 텔레비전, 잉여가 아닌 인간들, 링거, 침대 등을 이용한 행동들은 모두 나의 신음 소리였던 것이다. 나의 최선을 다한 생활이었던 것이다. 병원에서 환자복을 벗기까지 견뎠던 그 시간들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낀다. 낡은 병원의 6인실에서든 독서실에서든 지옥철에서든 최선을 다해 살아남자. 여유가 된다면 다른 잉여의 신음 소리도 아껴주자




오리온 여잉추에서 오리온으로, 트위터에서 @yytt1029로 활동한다.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