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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옥상과 파상력 (임태훈)

어떤 단어는 맘껏 꿈꾸기에 부족할 게 없는 재료지만,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잠이 확 달아나는 단어도 있다. 나에게 옥상은 후자에 해당한다. 용산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불타던 그때의 망루가 화인(火印)처럼 머릿속에 새겨진 뒤로 증상은 여전하다. 건축에 대한 내 취향으로 말하자면, 요즘 유행하는 비정형 건축물의 기발한 디자인에 쉽게 호감을 느끼는 축에 속한다. 하지만 생각의 흐름은 어쩔 수 없이 그날의 망루에 겹쳐진다.

 

그곳은 용산 4구역 재개발의 보상대책에 반발하는 철거민들의 투쟁 장소였다. 경찰은 크레인에 연결한 컨테이너를 망루에 진입시키는 작전을 강행했고, 이 과정에서 우려했던 화재가 발생했다. 아비규환의 불덩이 속에서 6명이 죽고 24명이 부상당하는 대참사였다. 2009119일의 일이었다. 이 모든 광경을 뉴스 채널을 통해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사람까지 죽여 가며 억지로 강행됐던 용산 개발 사업은 온갖 파행 끝에 총 사업비 31조 원을 허공에 날리고 2013년 파산했다. 용산 국제 지구에 들어설 예정이었던 초고층 빌딩 숲의 상상도에는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건축 디자인의 최신 경향이 다 담겨 있었다. 헛꿈이 되어버린 상상도. 적어도 십 년 이내에 이만한 대형 프로젝트가 서울에서 재개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이후로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가 사실상의 대공황 상태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에 이어 재집권에 성공한 새누리당과 박근혜 대통령은 창조경제에 복무할 수 있는 상상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이 나라에서 꿈을 꾸는 힘은 국력이 될 수 있을까? 이 힘은 허공에서 생겨나지 않는다. 우리 몸이 서 있는 장소의 실제가 지상의 오욕과 비루함 속으로 꿈을 끌어내린다. 폐허로 남겨진 용산이 이 시대에 요구하는 것은 파상력(破像力), 꿈에서 단호하게 깨어나는 힘이다. 파상력은 허황한 미래의 표상을 믿지 않는 힘이자, ‘지금, 여기의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를 의미한다.

 

2009년의 화인은 용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해 8월에는 점거농성 중이었던 쌍용자동차 평택 공장이 공권력에 유린당했다. 도장 1공장 옥상으로 경찰특공대가 헬기와 컨테이너를 타고 내려왔다. 이 장면도 뉴스를 통해 생방송으로 지켜봤다. 경찰과 노조원 간의 극렬한 충돌은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공장 옥상 위에서 장장 5시간 동안 싸움이 이어졌다. 이날 부상자만 46명이었다. 그 후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지금, 여기가 켜켜이 쌓여가고 있는 2010년대의 오늘은 결국 2009년 이후의 시간이다. ‘용산쌍용차는 거주 불가능 사회로 진입한 대한민국의 미래를 예언하는 단어가 되었다. 쌍용차 부당 정리해고가 시행된 뒤 지금까지 24명이 목숨을 끊었다. 5년간의 노숙농성과 171일간의 철탑 고공농성, 17개월에 걸친 천막 농성이 이어졌지만, 쌍용 자동차의 해직 노동자들은 일터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것은 그들만의 불행이 아니다. , , 고등학생의 현실이, 20~30대 취업자와 미취업자들의 현실이, 세파에 닳고 닳은 중년들과 외로움에 결박당한 노인네들의 삶이 용산쌍용차가 내몰렸던 옥상 끝에 줄지어 서 있다.

 

홀로코스트 이후로 시를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나에게도 옥상2009년 이후로 함부로 상상력을 펼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실히 깨닫게 된 것은, 옥상의 정치라는 전시 · 출판 기획에 필자로 참가하게 되면서부터다. 이 기획을 제안하신 김만석 선생님과 아이디어를 주고받을 때만 해도, 나 같은 오덕 감성의 글쟁이라면 용산쌍용차의 중력에 붙들리지 않고 상상력을 맘껏 펼칠 수 있을 줄 알았다. 공기 주입식 모듈형 주택, 지구온난화로 도시가 침수됐을 때를 대비한 구름 도시 프로젝트 등을 예로 들면서, 현실 정치에 함몰되지 않고 뭔가 다른 세계를 보여줄 수 있는 옥상 콘셉트를 소개하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2014321일 개장이 예정된 세계 최대의 비정형 건축물 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이하 ‘DDP’로 표기)에 대해서도 나는 내심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했다. 이 건물은 정식 공개 이전부터 서울 신청사, 새빛둥둥섬과 함께 오세훈 전 시장이 싸질러 놓은 3대 똥 덩어리 시리즈로 악명이 자자했다. 동대문의 지역적 특수성을 고려해서 주변 경관을 해치지 않으면서 조선 이후 600년 역사를 반영할 수 있는 디자인이 DDP 프로젝트에 반영됐어야 했다는 비판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떤 디자인이 600년 역사를 한 장소에 어우러지게 할 수 있을까? 이 지역에서 근래 20년 동안 주변 경관을 고려해 지어진 건물은 단언컨대 단 하나도 없었다. 튀고 또 튀려고 몸부림치는 건물이 난립했던 지난 20년 동안의 역사는 DDP 프로젝트에 어떻게 반영될 것인가? 따지고 보면 흥인지문(興仁之門)조차 조선 후기(1869)에 새로 지은 건물로 600년 세월에 턱없이 미치지 못한다. 소위 전통이라고 부르는 문화 대부분은 근대를 거치며 재구성되거나 새로 발명된 것들이다. 동대문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는커녕 가장 솔직하게 까발려 놓은 장소다. 아침부터 한밤중까지 엄청난 유동인구가 휘몰아치는 이 지역은 역사의 어우러짐 같은 건 불가능한 장소의 대명사였다. 동대문에서 면면히 지켜진 전통을 부득불 딱 하나 꼽는다면,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어떤 문화적 정형(定型)의 연속이 아니라, 부글거리는 현재의 표면에 바짝 밀착된 속도 추구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정형 건축술의 극단적 실험이 집약된 자하 하디드(Zaha Hadid)DDP 설계는 이 지역이 맞이하게 될 말세의 풍경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린다. 서울은 용산 재개발지구의 폐허에 이어 우리 시대가 맞이한 파국의 풍경을 가장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는 또 하나의 거울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내가 DDP를 나쁘지 않게 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씁쓸한 이유다.

 




DDP (사진출처 designfestival.co.kr)



과잉 개발, 과잉 공급된 이 지역 부동산 시장에서 과연 DDP의 순항을 낙관할 수 있을까? 개장 이후 5년이 넘도록 상가가 활성화되지 못한 가든파이브의 전철을 DDP는 피해갈 수 있을까? 젊은이들의 쇼핑채널이 온라인 쇼핑몰로 옮겨가고 중국산 저가 제품과 글로벌 저가 브랜드의 인기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DDP가 동대문 상권의 구원 투수 역할을 해낼 수 있을까? DDP 인근의 노점상들은 서울시의 단속을 피해 어디로 옮겨가야 할까? 한층 가속된 자본의 속도에 뒤처지면 사람이든 건물이든 가차 없이 퇴출이다. 이곳 역시 용산쌍용차의 숙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5,000억 원을 쏟아 부은 DDP라고 예외가 아니다.

 

자하 하디드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건축을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즐겁고 낙관적인 생각을 하도록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 영감을 주고 흥분시키고 감정적으로 흔들어 놓는 것.”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 경제에서 살아남기 위해 밤낮없이 몸부림치는 우리의 삶은 색다른 디자인에서 느끼는 자극과 흥분만으로 채워지지 않는다. 비정형 건축물로 치장된 신자유주의 사회의 외관은 새로운 계급 사회의 장벽이다. 이 장벽을 창조경제의 미래가 상영되는 스크린으로 볼 것을 강요하는 감언이설에 우리는 언제까지 휘둘릴 것인가?

 

사물의 본질은 종종 결핍된 것에서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DDP에는 놀랍게도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는 옥상이 없다고 한다. 하디드의 원래 설계안에는 사람들이 동네 언덕을 오르듯 비스듬한 건물 벽을 타고 걸을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건설 도중 성벽과 유구가 발견돼 이를 피해 짓다 보니 건축 면적이 좁아졌고, 안전 문제로 옥상 정원의 일반인 접근이 불가능해졌다. 아마도 이것은 DDP가 우리 시대의 풍경을 비춰내는 첫 번째 방식인 듯싶다.



임태훈 한국 현대문학과 문화 전공. 소리의 문화사, 미디어의 역사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 인문학협동조합 미디어 기획 위원장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대표 저작으로 우애의 미디올로지 : 잉여력과 로우테크(low-tech)로 구상하는 미디어 운동(갈무리, 2012), 문학사 이후의 문학사(푸른역사, 2013)가 있다.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