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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실손보험에 들지 않기로 결심했다(김잡초)

잉여 총량의 법칙이 있기는 있는가 보다. 남매 잉여가 기적적으로 취업한 지 세 달째, 엄마가 기다렸단 듯이 잉여 타이틀을 물려받았다. 엄마는 이제 아프다.

 

삼류 드라마 욕하지 않기로 함

설 마지막 날 새벽, 우리는 응급실에 있었다. 엄마는 머리가 어지럽다 했다. 몸이 얼음장 같이 차가웠다. 응급실 의사는 단순한 저혈압이라 했다. 문제는 그 다음날이었다. 엄마가 다니고 있던 회사에 처방전을 제출하기 위해 병원을 다시 찾았더니, 의사가 심각한 병명을 이야기했다. 10만 명 중에 1명이 걸리는 희귀질환이란다. 원인도 모르고 약도 없는데다가 발병하면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된다고 했다. 그다음은 글로 옮기기도 싫다.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알겠지만 CT상으로는 충분히 의심이 가는 상황. 예상치 못한 전개에 우리 가족은 할 말은 잃었다. 아무튼 삼류 드라마 욕 하면서 볼 게 아니다.

 

매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던 남매는 오랜만에 힘을 합쳤다. 당장 큰 종합병원에 예약을 하고 백방으로 관련 자료를 뒤졌다. 지금은 각종 검사를 받으면서 확진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검사비만 150만원이 들었다. 그 과정에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왜 여태껏 실손 보험 하나 가입하지 않았냐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실손 보험이란 감기나 상해사고, 각종 질병 등 병원 진료비와 입원비, 수술 등의 사용된 금액을 실손(실제 손해 본 금액)으로 보장해 주는 보험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직장인 치고 실손 보험 하나 없는 사람이 없었다. 다섯 살 난 아이를 둔 부장님은 아이의 상해를 보장해 주는 조건으로 매달 6만원을, 팀장님은 종합보장형으로 매달 3만원을, 비교적 이런 부분에 무지한 내 친구들도 대략 2만원~10만원 사이에 달하는 금액을 매달 실손 보험에 지불하고 있었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몇 달 전에 보험 설계사로 일하는 엄마 친구가 엄마에게 10만원짜리 실손 보험에 가입하라는 것을 들지 말라고 뜯어말렸던 게 나다. 그게 있었으면 지금까지 진단비로 지불한 200만원을 돌려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지금이라도 혹시 모르니 실손 보험을 드는 게 나을까, 아니면 여태껏 해온 대로 공공 의료보험 하나 믿고 사는 게 좋을까? 머리가 복잡해졌다.

 

우리가 언제까지고 건강한 몸으로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지금은 감기나 알레르기, 기껏해야 치질 정도로 병원을 찾는 정도겠지만 언젠가는 당뇨병, 관절염, 뇌졸중, 암 등의 질환으로 병원을 찾게 될 수 있다. 그에 따라 병원비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될 것이다. 2009년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의하면 국민 1인당 연간 진료비는 20대는 35만원이지만 연령이 증가할수록 점점 늘어나 65세 이상은 248만원에 이른다. 평균이 그렇다는 거고, 진짜 심각한 질환에 걸리면 돈 1,2천만원 깨지는 게 우습다는 건 상식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래를 위해 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다음은 실손 의료보험에 관해 고민한 한 달간의 기록이다.

 

<식코>의 기억

엄마를 말린 이유는 있었다. 예전에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를 보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한 다큐)는 미국 의료보험 체계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식코>의 첫 장면은 췌장암 환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크리스 도나휴는 7년 동안 보험 회사에 보험료를 착실히 내왔지만 수술비의 보험 처리를 거절당한다. 보험 약관에 췌장암에 대한 조건이 없다는 이유였다. 이 외에도 영화에는 보험료를 착실히 내왔지만 절실한 순간에 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 여러 사람의 사례가 소개됐다. 그리고 그 보험은 바로 지금 우리나라에 대유행 중인 실손 의료보험이다.




Sicko, 2007



피해자들이 하는 말은 한결같다. 보험사에서 감기부터 암까지 각종 질환을 모두 보장해주겠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걸린 병은 빠져있었고, 이런 사실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은 보험사가 사기를 쳤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모든 암을 다 보장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알고 보니 췌장암 말기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식의 약관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보험 설계사가 제대로 고지를 해줬던들 그 많은 용어를 제대로 알아들을 수 있었을까 싶다. 보험 용어는 법조문 판결만큼이나 모호한 단어들로 가득한데다가 계산도 꽤 복잡하다. 영화 속 주인공도 우리네 엄마들이 그러하듯 보험 설계사를 믿고 계약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보험 설계사를 믿는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를 보여준다. 더 많이 팔아먹고 더 적은 보장을 해주려는 민간 보험회사, 그들의 로비에 놀아나는 당국과 국회의원들, 그 시스템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며 이윤을 남겨먹는 병원이 철저하게 협력하는 시스템 앞에서 개인은 무력했다.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면 미국과 한국의 의료체계는 다르다는 점이다. 미국은 공적 의료보험이 약하고 영리 병원이 자리 잡고 있는 반면, 한국은 공적 의료체계가 보장 범위가 비교적 넓고 아직까지는 비영리 병원이 대부분이다. 모든 보험은 병원 체계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움직인다. 따라서 <식코>에서 사기꾼들의 계략처럼 그려진 미국의 실손 보험도 한국에서는 유용하게 사용될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렇게 나쁜 거라면 내 주변 사람들이 왜 모두 실손 보험에 가입했겠는가?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의 규모와 주변인들의 말 속에 그간의 생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뒤늦게 사람들이 그토록 칭송해마지 않는 실손 보험에 가입하면 어떤 일이 생기는 지 알아봤다. 일단 개인적으로 연이 닿는 보험 설계사 두 명에게 엄마가 실손 보험을 들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현재 진단받을 수 있는 질병에 대한 보장은 안 될 터이니, 그 병으로 인해 부수적으로 걸릴 수 있는 질환에 대한 보장이 가능한지 물어봤다.

 

첫 번째 결론은 명확하다. 엄마는 어떤 실비 보험에도 가입할 수 없다. 이미 질병이 발병했거나 의심되는 사람은 가입 대상자에서 제외된다. 실손 보험은 젊고 건강한 사람을 가입자로 원하지, 늙고 나이든 사람을 위해 있는 제도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개인의 신체에 대한 미래의 위험을 사고파는 게 민간 보험인데, 리스크가 커진 신체는 매력적인 투자 대상이 될 수 없다. 이게 바로 공공 의료보험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공공 의료보험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국적은 따지겠지만 이건 또 다른 문제다.) 공공 의료 보험은 사람을 이윤을 뽑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국가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본다.

 

그다음은 나에게 꼭 맞는 실손 보험을 추천해 준다는 사이트에서 전화로 무료 상담을 해봤다. 내가 지금 실손 보험에 가입하면 미래에 엄마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얼마나 보장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다. 친구들이 많이 넣는다는 2~3만 원대의 실손 보험으로 알아봤다. 설계사는 보장이 잘 된 편이라는 A사와 B사의 보험을 추천해 주었다. 그런데 3만 원대는 가벼운 질환만 보장되고, 암과 같은 중증 질환에 대해서는 보장이 안 된다며 2만원 더 보태서 특약을 넣으라고 했다. 나는 48천원~9천 원대 실손 보험을 추천받았다.


 

, 돈 있으면 호구 좀 잡혀 보실래여?

설계사는 모든 질병에 대한 진단비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A사 보험 약관에는 ‘5대 고액암 확진 시 진단비 지급이라고 쓰여 있. 그렇다면 5대 고액암에 포함되지 않는 암에 걸렸다면 진단비가 나오지 않는다는 소리가 아닌가?

 

B사의 약관은 그나마 솔직했다. ‘유사암의 경우에는 진단비를 지급하지 않는다고 적혀있었다. 아마도 이 말은 긴가민가한 종양 때문에 검사를 받았을 때, 암으로 판정되지 않으면 진단비를 주지 않는다는 뜻인 듯하다. 최초 1회 확진에 대해서만 진단비를 지급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암이 왜 무서운 병인가, 암세포가 재발해서 계속 항생제 맞다가 환자가 암세포보다 먼저 나가떨어져서 죽는 병이 암이다. 그런데 최초 1회 진단 시에만 돈을 지급한다고? 이 쯤되니 살짝 짜증이 났다. (에라이, 누구를 코흘리개로 아나. 매달 5만원에 20년이면 1200만원이나 납입해야 되는데, 이게 도대체 누구 호구 잡는 소리야? ?)





A사의 보험 약관



B사의 보험 약관



 

그 외에도 여러 질병에 대한 조건이 있었는데 희귀 질환에 대해서는 딱히 말이 없었다. 엄마가 걸렸을 것이라고 의심되는 질병은 정부에서 그나마 보조를 해주는 167개 희귀 질환에도 포함되지 않는다. 대표적인 중증 질환인 암에 대해서도 이렇게 보장이 박한데, 한국에 담당하는 의사도 몇 명 없는 희귀 질환에 대해서 과연 보장을 해줄까? 내 생각에는 회의적이다. 물론 통상적으로 추천하는 보험이 이렇다는 소리고, 본인이 희귀질환에 대한 특약을 넣으면 결과가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알아보고 싶지가 않아졌다. 갱신이니 비갱신이니 용어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그걸 설명해주는 보험 설계사를 믿을 수가 없으니 듣고 나도 호구 잡힐 것만 같아 두렵다.

 


그럼 뭘 믿고 살아야 하나

추측컨대 아마 나는 친구들이, 팀장님이 가입했다는 실손 보험에 들었다하더라도 30년 후에 엄마와 같은 질병에 걸렸을 때 별다른 보장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엄마 친구가 권했다는 10만원짜리 보험은 조금 달랐을 지도 모르겠다. 후회해봤자 소용없으니 지난 일은 잊기로 한다. 하지만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실손 보험도 안 들면 나는 질병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무기력하고 막막한 느낌이다.

 

모두가 아프면 이렇게 사막을 헤매는 심정으로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 싶다. 까마득하게 잊고 있었던 건강 보험 하나로정책이 떠오른다. 2010년부터 시작된 이 정책은 1인당 월평균 건강보험료 11천원을 더 내고 전 국민이 필요한 만큼 혜택을 받자는 내용이었다. 즉 의료보험으로 더 많은 질병을 커버하고 국민이 직접 내는 비용을 줄이기 위해, 더 많은 보험료를 내자는 것이다. 노동자가 1만원 더 내면 고용주도 의료 보험비를 1만원 더 보조해야하고 정부 보조금도 1만원 더 늘어나는 구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분명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다. 게다가 공공 의료는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도 혜택을 본다. 한 사람 한 사람 들어야하는 민간 보험에 비해 혜택의 범위가 넒은 것이다. 그러니 언제 잉여가 될지 모르는 인생, 건강 보험료 인상을 지지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작년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보험료 30%를 인상하는 대신 일인당 연간 의료비를 100만원 이하로 제한하자는 정책을 발의했다. 이에 대해 당시 박근혜 후보는 건보료 폭탄을 운운한 바 있다. 글쎄, 그게 진짜 폭탄일까.

 

마이클 무어 감독은 <식코>에서 이런 말을 했다. “국민을 통제하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공포를 주는 것이고 둘째는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것입니다.” 건보료 인상이 폭탄이라는 주장과 민간 실손 보험을 들지 않으면 맨몸으로 세상에 떨어져 사는 듯한 불안한 느낌은 어디에 속할까.

 

시도 때도 없이 공포 마케팅이 훅훅 치고 들어온다. ‘건강보험 하나로가 현실화되기엔 너무 멀고 실손 보험은 너무나도 가까이 있다. 입바른 말이라고 쓰기야 썼지만 나는 내일도 고민할 것이다. 그래서 당신들에게 묻고 싶다. 정말이지 우리는 질병에 어떻게 대처하고 대비해야 하는 걸까. 

 


김잡초 주변에 불행 분포도가 높다고 농담처럼 말하고 다녔는데 이제 그런 말 하지 않기로 했다.

요즘 꽂혀 있는 노래 양양의 <이정도>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