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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지망생입니다 (경덕쿵)

얼마 전 MBC 다큐스페셜 작가로부터 쪽지가 왔다. 블로그웹진에 기고한 글을 보고 연락했다고 한다. 출산률 저하 문제를 청년 문제에서 찾아보려는 다큐 기획 중에 담당 작가의 우연히 내 글을 보게 된 것이다. 고시원 생활과 주거문제에 관한 두서없는 글이었다. 아마도 고시원에 사는 미취업 졸업 유보생이란 포지션, 약간의 냉소를 품은 사회적 발언 등에서 섭외 가능성을 봤으리라.

 

4회에 걸친 작가와의 전화 인터뷰. 안타깝게도 난 자격 미달이었다. 문제 현상을 대표하기 위해선 외적 조건 뿐만 아니라 내적 조건까지 만족시켜야 하거늘, 주제에 어울릴만한 어둡고 음습한 감정선이 내겐 부족했다. 없는 여자친구에 대해 집요하게 물어보며 혼자 살아서 그런 건 아니냐는 둥, 경제적인 문제와 관련이 있는 건 아니냐는 둥 기획의도에 맞는 메세지를 끄집어내려는 작가의 안간힘이 보였다. 일부 수긍하며 정책에 대한 비판으로 공감의 장을 이어가기도 했지만 결혼계획이나 자녀계획에 대한 질문에서 "때가 되고 인연이 닿으면 할 '수도' 있겠죠." 식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작가의 기대를 저버리곤 했다. 촬영은 당일 취소됐다.

 




이런 반응이라도 바랐던 걸까? (웹툰 '미지의 세계' 중)




스텝들 인원수에 맞춰 사놓은 비타500 다섯병은 내가 다 마셨다. 이번 기회로 2평이 채 안되는 방이지만 대청소까지 했다. TV 나온다고 들떴나보다. 어쩔 수 없다. 없는 감정을 쥐어짤 수는 없지 않은가. 분수에 맞는 생활이라 여기며 큰 불만 없이 살아가는 청년의 태도는 프로그램 기획 상 결격사유가 된다. 물론 내가 처해있는 환경과 그것이 갖는 사회적 함의를 모르지 않는다. 그것에 분개하고 풀리지 않는 구조적 모순에 답답한 마음이 들 때가 종종 있다. 하지만 시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개인이 자기 앞에 놓인 현실을 뚫고가는 태도는 다를 수 있다. 개개인의 태도와는 별개로 미디어의 기획은 정치적일 수밖에 없고 구조의 문제와 개인의 고통을 대응시키는 과정에서 보편성을 추구한다. 안타깝게도 내 경우엔 그 요건에서 벗어나 있었다.

 

개인 성향 탓이다. 수시로 경로를 바꾸는 변덕스러움, 느슨한 계획 속에 오늘과 내일의 재미를 찾는 카르페디엠 등의 성분은 손에 닿지 않는 미래를 지워버린다. 나는 내 미래를 그닥 궁금해하지 않는다. 뭐라도 돼 있겠지. 어떻게든 살아 있겠지. 따위의 느긋함에 부모님의 한숨은 늘어간다. 부모님에게 청년구직자로 대표되는 이미지는 또렷하다. 스펙 경쟁. 서류 낙방. 낙담. 좌절. 우울. 원형 탈모. 이런 치열함과 어두운 기색 없이 마냥 태평한 아들의 모습에 부모님의 시름은 늘어가니, 이 아이러니함을 타개할 유일한 길은 '거리두기'라는 결론. 이것이 내가 출가를 자처하여 1인 독거남이 된 요인중 하나가 되겠다.

 

더불어 나름의 방식으로 진화한 생활 양식이라고도 생각해본다. 노력과 의지로 그에 부합하는 성취를 누리던 산업화 세대의 미덕에 균열이 간 지 오래. 성취감에서 삶의 동력을 얻기 힘든 시대에 다른 미덕을 추구하는 시도는 건전하다는 생각이다. 내전이 일상인 마을의 취재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생사의 가느다란 경계 위에 서있는 사람들. 그들의 삶은 오늘에 집중된다. 포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하루 하루 웃음끼 없는 표정으로 일관할 거라 생각했지만, 잠깐 주어진 휴지기에 순간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그들을 보았다. 불확실함과 오래 마주하며 찰나의 시간을 독립적으로 사용하는 법을 터득한 걸까. 그렇게 오늘을 살고, 간밤에 별 탈 없다면 다시 내일을 살고. 그렇게 하루단위의 삶을 보내는 것이 그들의 생존 방식이라 생각했다. 노후 자금, 정년, 연금을 생각하기에 그들의 내일은 너무 불확실하기 때문에.

 

총성은 들리지 않을지언정 지금 내가 사는 곳의 먹고 사는 문제는 점점 불확실해지고 있다. 내가 추구하는 삶의 방식도 그에 들어맞게 진화한 거라면 비약일까. 미래가 불확실하지만 오늘도 난 살아있고 내일도 별 탈 없을 예정이니 그런대로 살만하다. 듣고싶던 글쓰기 수업을 듣고 있고 하고싶은 공부를 하고있다. 알바를 구했고 다음 달 입금 날짜가 정해졌다. 처음 해본 소액 대출도 조만간 갚을 예정이다.

 

조각난 시간 속에서 살아간다.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이런 나를 누구에게 소개하기란 참 어렵다. 난 내가 뭐가 될 지 여전히 모른다. 그래도 무얼 지망하냐 묻는다면 이렇게 답해본다.

 

"내일 지망생입니다."

 


 

경덕쿵 beat917@naver.com

웹진 c-through 에티터

잘 하는 것 : 근근히 생활하기, 의식의 흐름 따르기

을의 횡포를 꿈꾸는 중

 



(격)월간잉여 17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