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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인성교육'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않아요 (지세준)


지난달에 한 고등학생과 학교 내 부조리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감수성은 요즘 시대의 카톡 감성과 비교했을 때 유난히도 예민한 면이 있었고, 나는 그 관점이 굉장히 흥미로워 2012년에도 반복되고 있는 학교폭력과 교사 문제, 입시교육에 찌든 학생들의 문제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긴 이야기의 말미에, 그 아이는 정확히 이렇게 말했었다. “학교에서는 인성교육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요. 인성교육을 강화한다면 아이들이 이렇게까지 삭막해지지 않을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고 너무나 심금이 웃겼던 나머지 입 밖으로 비웃는 소리를 낼 뻔했다.


앞에 소개한 나의 이야기는 인성교육에 관한 나의 가장 감정적인 반응을 소개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내 반응에, 또는 나의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월간잉여의 독자들 중에서도 많을 것으로 안다. 하지만 나는 인성교육이라 불리는 어떤 가치체계가 한국 ()교육의 문제에 아무런 해결이 되지 못할 것이며 이미 한국 사회에 만연한 대중 기만의 가짓수만 하나 더 늘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 교육시스템 아래에서 인성교육이 아무것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고유명사로써의 인성교육, 또는 그것이 포함하고 있는 일정한 가치체계는 시험에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년 전에 우익 계열 단체에서 역사 과목의 좌편향적 서술을 걸고 넘어지는 바람에 한동안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사건의 전개과정을 지켜보면서도 한동안 비웃음을 그칠 수 없었다. ‘우리의 공교육에 대한 가치체계 안에서 가장 중요했던 삼계명은 국영수, 또는 언수외 성적이었지, 역사 교과서의 현대사 파트의 글줄 몇 개가 아니었지 않는가.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 왜 새삼스럽게 역사 교과서를 가지고 빨갱이니 뉴라이트니 어쩌며 싸웠단 말인가하고 말이다. 엄연히 수능 교과목에 등장하는 역사를 가지고도 비웃음이 들었던 나인데, 시험도 볼 수 없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높여달라고? 공부 잘 하는 잔머리들은 애초에 신경 쓰지도 않을 문제고, 비판적인 사고가 불가능한 학생에게는 이 또한 국가주도의 권위주의적이고 재미없는 교육과정으로 인식되어 수업시간에 몰래 보내는 카톡 메세지에 간단히 씹힐 문제다. 굳이 이 인성교육을 객관화시켜 시험 문제로 내 봤자, 그 가능성의 최대치는 몇몇 대기업의 신규채용 때 작성해야 하는 인성 테스트밖에는 안 될 것이다. 그런데 그거, 진심을 다해서 작성한 사람이 있기는 합니까?

 

그리고 더 본질적인 문제인 두 번째 이유는, 한국의 학생들은 이미 특정한 방식으로 인성교육을 받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원래 교육이란 특정 집단의 선동질이나 어느 날 갑자기 편입된 인성교육 패키지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이 매일같이 보고 느끼는 것들에 하나하나 녹아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학생들이 하루의 대부분을 부대끼는 교실 이데아로 상징되는 입시라는 단일목적 하에 놓인 초중교 교육은 우리에게 이러한 인성을 가르쳐주었다.

 

양심, 연대, 협력은 개나 줘라. 돈이 최고, 힘이 최고다. 남을 꺾고 약육강식의 승자가 되어라. 범사에 순종하라. 권력에 맞서는 자에게 줄빠따의 화가 있을진저. 모난돌은 정을 맞는다. 대세에 순응해라. 권력을 숭앙하고 국가주의에 굴복해라. 매일같이 느껴라. 뼈저리게 느껴라. 온몸으로 느껴라.”

 

많은 진보적인사들이 막연하게, 또는 구체적으로 품고 있는 인성교육이라는 환상이 이토록 하찮게 느껴지는 시스템 전체의 위력이다. 맨 처음의 의제였던 인성교육 과정이 있느냐 없느냐는 이러한 측면을 고려한다면 논점 일탈의 오류에 가까울 정도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인성교육 논의가 가지는 가장 큰 맹점으로, 모든학생들이 그 인성교육의 가치들을 따라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는가? 넓은 의미에서, 초중고 교육은 그 커리큘럼과 교수방법이 무엇이 되었든 사회유지적 이념을 (반대급부 없이) 학생들에게 프로그래밍하는 작업이 될 수밖에 없고, 예로부터 권위적이고 부도덕한 국가가 강요하는 국가공인 가치관이란 역사나 사회문제를 깊이 고민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는 비웃음의 대상일 뿐이었다.


국가가 나서서 인성을 가르치고, 정형화된 가치관을 가르치고, 더 구체적으로는 감히 선생님 말씀에 의문을 품으면 무엄한 놈으로 싸대기를 맞는상황이 계속될수록 그러한 이들의 지적 불신과 좌절은 더욱 심화될 것이며, 나머지 다수의 학생들은 기성세대가 주입한 전체주의적 가치관을 지닌 채 사고할 줄 아는 이들의 발목을 잡는 역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초중고 십이 년을 정말이지 지긋지긋하게 시달려온 사람들이 겨우 그 문턱을 넘어서서 생각한 것이 인성교육밖에는 없다니, “(사람에게) 맞으면서 배우는 건 (사람) 때리는 것밖에 없다*던 UMC/UW 횽아의 명언이 머리에 울린다. 정말이지 부끄러운 줄 알길 바란다.

 






짤방 출처: 모름




내가 당신들의 인성교육론에 가장 경멸스러웠던 부분은, 어느 한 쪽에서 시작된 기만의 결과가 대부분 기만의 대상만이 바뀐 채 계속된다는 반복성에 있다. 국민교육헌장의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며, 자유세계의 이상을 실현하는 기반이다.“는 구절이 그랬고, 수능에 편중된 입시교육의 폐해를 줄인답시고 또다른 평가항목들로 학생들을 괴롭히는 현재진행형인 역사가 그렇고, 어떤 교육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다른 교육으로 해결하면 되겠지 하는 당신들의 얄팍한 사고가 그렇다. 진정 창의적이고 열정에 넘치는 청년을 만들고 싶다면, 덧없는 기만을 반복하는 당신들부터 그 청춘의 발밑에 깔려 반세기쯤은 오욕을 감내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여기서 전면적 교육 개혁이나 요즘 애들은 다 멍청해서 뭘 몰라. 처음부터 차근차근 가르쳐 줘야 해따위의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그것은 교육에 관한 나의 가치관에 어긋나는 것이며, 내가 그 가치관을 갖기까지의 과정을 고려해본다고 해도 그다지 타당한 이야기가 아니다. 나는 이 사회에 공교육이라는 것이 정말로 필요하다면, 그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계몽보다는 의심의 계기를, 인성보다는 토론을, 모든 이타성을 버리고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음을 중요히 생각하는 쪽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아는 어떤 권위적인 국가도 그것을 실행시킬 의지가 없는 것 같으니, 나는 스스로의 구원을 실행할 줄 아는 소수의 사람들과 가까이하는 것으로 내 교육론에 대한 대답을 대신해야 할 것 같다. 이 행위의 비슷한 말은 잉여짓이다.

 


*참고문헌

UMC/UW, 2010, <선배학입문>, «Love, Curse, Suicide»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