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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너무 열심히 일해도 문제 (김진수)

[리뷰] 영화 <남영동 1985>

 

고통스럽고 무서웠다. 그가 전기고문을 받는 동안 온몸에 소름이 돋고 창백해졌다. 보는 관객이 이 정도였는데, 실제로 고문을 받은 그는 어땠을까. 영화 <남영동 1985>는 고() 김근태 의원의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영화다. 영화에서는 김종태(박원상 분)라는 이름으로 바뀌어서 나온다. <남영동 1985>는 김종태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로 끌려가 22일 동안 고문 받은 처참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의: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인간 도살장’ 1985년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515

영화 속 내용에 큰 반전은 없다. 내용이 허술하다는 뜻이 아니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고문이라는 단 하나의 키워드를 통해, 김종태의 절벽보다 더 깊은 절망과 처절함을 그리며, 동시에 고문관들의 악마와 같은 악랄함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그냥 처음부터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최선일지도 모르겠다.


영화는 고 김근태 의원의 자서전 <남영동>을 바탕으로 했다. 김종태가 끌려간 남영동 대공분실은 경찰 공안수사당국이 빨갱이를 축출해낸다는 명목으로 소위 공사를 하던 고문실이었다. 아니 인간도살장이었다.


이야기는 198594일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갑작스럽게 남영동으로 끌려온 김종태는 온갖 고문으로 좁고 어두운 시멘트 바닥을 뒹굴며 거짓 진술서를 강요받는다. 그가 받은 고문은 상상을 초월 한다. 며칠 동안 잠을 못자고, 고문관들 앞에서 팬티만 입고 밴드로 눈을 가린 채, 무릎 꿇고 구둣발로 짓밟히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미 여기서 그의 자존심, 체면...그런 건 내동 강이 쳐진 것이다. 아니 그 정도면 다행일지도 모르겠다.


본격적인 고문은 고문기술자 이두한(이경영 분)이 등장하면서 시작된다. 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가지고 오라는 지시를 내리는 그는 김종태를 그 위에 눕히고, 물고문을 시작으로 악마와 같은 일을 자행한다. 이에도 김종태가 계속 (거짓) 자백을 하지 않자, 물에 고춧가루를 섞는다. 믿을 수 있겠는가. 수건으로 얼굴을 감싼 후, 코와 입에 집중적으로 쏟아 붇는 물고문에 김종태의 배는 풍선처럼 부풀어 오르고 만다. 이 쯤 되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다. 하지만 이것조차 마지막이 아니라는 사실에 관객 또한 곧 절망의 늪으로 함께 빠진다.


이두한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이름도 무시무시한 전기고문이었다. 그는 고문을 약간 즐기는 듯 했다. 여유 있는 표정으로 휘파람으로 클레멘타인을 불며 전압을 올렸다가 내리면서 김종태가 죽지 않을 정도로 조절한다. 김종태는 그 충격으로 인해 입에 거품을 문다. 내 몸도 함께 싸해지고, 얼굴이 창백해졌다. 눈을 감고 싶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고문에 누가 버틸 수 있으리. 처음에는 어떡해서든지 견디려고 했던 김종태는 이 상태가 지속되면 결국 쥐도새도 모른 채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결국 고문의 고통 속에서 그는 자신이 가담한 적 없는 범죄계획과 존재하지도 않는 단체의 조직도를 줄줄 외우고, 민주화 운동 당시 지인의 이름까지 공범이라며 적어내고야 만다. 그의 영혼은 살아있었을까.


이처럼 영화는 고문 장면 하나하나를 (하필이면) 생생하게 표현했다. 그래서 보는 관객도 러닝타임 내내 함께 괴롭고 고통스러웠다. 아무리 연기라고는 하지만, 박원상 씨의 정신건강이 염려되기도 했다. 반대로 이경영 씨는 진짜 살아있는 악마 같았다. (연기를 잘한 탓!)

 


영화 남영동1985 (2012)




악의 평범성

미국의 정치학자 한나 아렌트는 1963년에 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에서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뉴요커라는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이 재판과정을 취재한 아렌트는 이 책에서 아이히만이 유태인 말살이라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은 그의 타고난 악마적 성격 때문이 아니라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는 사고력의 결여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아렌트의 초상을 담은 우표(1988)




<남영동 1985>에 나오는 고문관들도 같다. 영화 속에서 비춰지는 이들의 모습은 고문을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평범한 회사원의 모습이다. 그들은 상부의 지시를 성실하게 따르며, 최동원과 김시진을 응원하는 야빠이기도 하며, 이성문제의 고민을 김종태에게 털어놓기도 하며, 진급문제와 가족문제로 고민하기도 한다. 문제는 앞에서 언급한 생각 없이지나치게 열심히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는 것이다. 자신들은 마치 국가를 위한 충성스러운 부하인 냥, 열심히 빨갱이를 잡기위해 무단히도 노력한다.

 


잉여가 된 고문관? 용서를 구한다고?

영화는 그로부터 20년 후를 비추며 끝을 맺는다. 암흑의 80년대가 지나고, 대한민국에 민주화라는 꽃이 만개해 있다. 그 덕분에 고문관들은 비자발적으로 잉여가 돼버렸고, 모두 구속됐다. 이두한 역시 감옥에 투옥된다.


우연히 이두한의 소식을 접한 국회의원 김종태는 교도소로 향한다. 단 둘이 만난 면회실에서 초췌해진 이두한은 김종태 앞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한다. 마치 영혼마저 악마일 것 같은 사람이 말이다. 용서를 구했다는 것 자체 또한 끔찍했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 내내 이런 감정이 끊임없이 반복된다.)


결국 김종태는 그를 용서하지 못한다. (당신이라면 하겠는가) 등을 돌려 면회실을 나가려는 김종태 등 뒤로 이두한이 고문할 때 휘파람으로 불었던 클레멘타인이 울려퍼진다.

 


반드시 기억해야 할 시절

영화를 보고 난 후 며칠 뒤, 마침 남영동에 볼일이 있어서 그 흔적을 찾아가 봤다. (지금은 경찰청 인권보호센터로 운영되고 있다.) 마침 주말이라 입구 문이 굳게 잠겨 있었다. 하지만 담장 위에 휘감겨 있는 철조망이 이곳이 끔찍한 역사의 공간임을 증명하고 있었고, 그 위로 살짝 보이는 작은 창문이 가득한 벽돌건물을 보니 영화 속 장면이 생각나 치가 떨렸다. 그리고 생각했다. 악한 시대에는 잉여로 남는 편이 악행에 가담하지 않는 방법이 아닐까.


관객은 영화를 통해 지난 역사를, 그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영화를 보고 함께 고통스러웠다면. 그 고통을 치유하고 더 앞서 나가는 것. 말은 간단하지만 쉽지는 않은 현실.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