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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마르소의 신발 세탁 (참치)






펄프(Pulp)<Mile End>를 들을 때마다 이강주의 만화 <캥거루를 위하여>를 떠올린다. 만화가들 중에는 음악 마니아가 유독 많은데, 이강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작품에는 장발에 찢어진 청바지 차림, 기타를 둘러멘 캐릭터가 조연이든 주연이든 하나쯤은 예외 없이 나왔다. 뮤지션 이름도 앨범 재킷도 마찬가지. 그런데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구체적인 곡 제목까지 나왔던 건 <캥거루를 위하여> 1권에 등장하는 펄프의 노래가 유일했던 것 같다. 물론 작품의 분위기나 주제와 딱히 관련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이강주를 <캥거루를 위하여>로 기억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90년대에 이름 석 자를 찬란하게 휘날렸던 스타 작가들의 이름이 뜸해진지는 꽤 됐다. 김진, 김혜린, 신일숙, 강경옥 등등. 아마도 출판만화의 입지 자체가 초토화가 되어버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거다. 물론 그때도 만화가 좋은 대접을 받던 시국은 절대 아니었지만, 적어도 시장 자체가 지금처럼 처참한 지경은 아니었다. 홍대 앞의 만화총판 북새통이나 한양문고에 가서 일본만화와 국내만화의 비율을 비교해보면 단번에 체감할 수 있다.(그런 만화 총판 자체가 다 없어지기도 했고. 옛날에는 동대문 가면 만화도매상이 지천에 널려 있었다.) 어쩌면 종이책으로 보는 만화 자체가 잉여의 양식이 되어 도태된 건지도 모른다. 참고로 나는 웹툰을 거의 안 본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만화책은 대부분 사서 소장한다. 웹툰의 매력과 작가들의 노력을 무시하는 바는 아니지만, 종이 위에 펜으로 그려진 만화에 비하면 도대체가 정이 안 간다.

 

이강주는 그때의 작가들 중에서도 말 그대로 난데없는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80, 90년대에 일찌감치 잉여의 코드를 캐치했던 작가였다. 1990년대의 공기가 지금과 많이 달랐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모르긴 해도 지금처럼 세상과 악다구니를 하는 기분이 들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조금은 지루하고, 나른하며, 맥 빠진 이강주의 작품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녀의 작품에는 변함없이 잉여로운 자들그녀의 실질적인 데뷔작인 단편 <149 콤플렉스>의 내레이션을 인용하자면 막무가내성 띨띨함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작품 자체가 그런 한가로움이나 멍청함과 어딘가 닮아 있기도 했다. 동주나 정수처럼 중성적이고 무심한 느낌을 주는 캐릭터 이름(작가 이름도 좀 그렇다), 빠지지 않는 데생 실력을 가졌음에도 뒤로 가면 갈수록 뭘 안 그리려고(?) 애쓰는 듯한 그림체, 치밀함이나 드라마틱함에 매달리지 이야기.

 




이강주의 단편집들

출처: www.bookncine.co.k




요즘 들어 느끼는 건데, 잉여는 소비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잉여의 이미지가 소비되고 있다. 머지않아 잉여의 사회학이나 잉여의 소통과 리더십, 잉여가 해야 할 50가지 따위의 자기계발서가 나올지도 모르겠다. 농담이 아니다. 벌써 조짐은 보이고 있으니까. 예전에 잉여가 세상을 바꾼다, 잉여는 더 이상 잉여가 아니라 한국 사회의 주역이 될 것이다, 뭐 이런 요지를 심오하게 설파하는 일간지 칼럼을 보고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건 참으로 흥미로운 아이러니 아닐까. 반자본주의적인 잉여가 상품화되고, 팔리고, 소비되는 것.(여기까지 썼을 때 마감 임박을 넌지시 알리는 잉집장의 섬뜩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잉집장은 안기부에 취직했어야 했다. 잉집장은 나를 소비하고 있다.)

 

그런데, 이강주의 잉여들은 그냥 잉여들이다. 희화화도 되지 않고 소비재도 되지 않는 순수한 잉여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세상과 충돌하고 갈등을 일으키는 법이 별로 없다. 물론 연애 사고 같은 소소하고 사사로운 갈등이야 당연히 있고, 가끔 자신의 잉여로운 아이덴티티에 대해 고민하긴 하지만, 옆에서 고작 허리 어깨 한 번 쳐주는 걸로 다시 행복해지곤 한다. 그들은 딱히 고독하지도 않고 스스로 분열되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이 풍진 세상에서 자기 존재를 증명하려고 발악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살 뿐이다. 살아가는 속도가 타인과 다르더라도 굳이 개의치 않고.

 

이강주의 초기 단편 <마르소의 행복나들이>는 그런 작가의 세계를 한눈에 보여주는 명함과 같다. 백수 마르소는 어느 날 심심하던 차에 신발 빨래를 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게 된다. 그의 친구는 그가 신발 세탁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는 걸 알아보고, 결국 마르소는 신발 세탁의 명인으로 세계적인 스타가 되어 부와 명성을 누린다. 죽고 싶었던 사람이 마르소가 세탁한 신발을 신으면 삶의 의욕에 가득 차게 되고, 음악가는 영감을 얻는 식이다.(<녹차향 아침>이라는 단편에 나오는 요리사 이야기도 비슷하다. “버섯전골이 날 웃겼어! 으하하하!”) 그러나 마르소는 유명세나 부와 반비례해서 자신이 점점 불행해지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그는 별 미련 없이 신발 세탁계를 떠난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이 직접 신발을 빨아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다시 행복해진다.

 

만화 같은 이야기다. 하긴 만화 맞다. 그리고 그것이 이강주의 세계다. 소비되고 팔려나가는 잉여는 잉여가 아니다. 사회적인 프리즘으로 들여다보면 마르소의 신발 세탁은 아름답고 생산적인 행위다.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즐거움을 주고, 자신은 돈과 명성을 얻으며, 어린이들은 그를 롤 모델로 삼는다. 한마디로 다양한 가치를 생산하는, 가장 이상적인 원 소스 멀티 유즈(One Source Multi Use)인 셈이다. 그러나 마르소에게 애초에 신발 세탁이란 즐거운 유희였고, 유희 없이 가치로만 교환되는 노동이란 어떤 대가를 안겨주든 행복과는 거리가 먼 것이며, 자신을 몇 가지로 분열시킬 뿐이다. 생산성 없는 인간을 암세포처럼 축출해내려고 혈안이 된 이 사회에서, 어떤 의미부여도 가치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것.

 

쓸모없는 이들은 그렇게, 그저 쓸모없는 채로 존재한다. 신분도 재화도 재능도 없지만, 그럼에도 뭘 애써 하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에게 자신의 존재 이유를 질문 받지 않는 사람들. 이강주의 세계는 그들에게 무리해서 존재의 의미를 찾아주지 않고, 그저 세상의 작은 균열처럼 받아들인다. 그리고 작가는 결국 그들에게 그들 자신과 비슷한 짝을 지어준다. 세상 모든 것은 대칭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지금도 어딘가에 수많은(혹은 소수의) 마르소들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이런 세계는 비현실도 도피처도 아닌, 느릿느릿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 웹진 weiv(http://www.weiv.co.kr)에 연재했던 칼럼을 수정해서 실었습니다.








※ 월간잉여 11호(창간 1주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