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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터뷰

실물이 더 나은 한윤형 잉터뷰







한윤형의 신간 <청춘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부제는 '청년논객 한윤형의 잉여탐구생활'이다. 부제를 보니 <월간잉여>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인 내가 꼭 읽어야 할 책으로 보였다. 그래서 읽었다. 


자신의 경험을 (그것이 밤에 자다 떠오르면 이불을 ‘하이킥’할 ‘흑역사’일지라도) 담담히 고백하고, 이를 통해 세대 또는 시대의 특성을 읽어낸 1부가 특히 마음에 들었다. 예를 들어 “잡다한 주제로 선행 학습 진도 빼듯이 독서”를 하고 남들보다 많이 아는 것에 대해 우월의식을 가졌던 학창시절을 고백하며 ‘중2병’에 걸린 이들이 많은 세대의 보편성과 대입시험의 특성을 고발한다. 손님-주인의 관계를 뛰어넘었던 ‘인생의 술집’이 일언반구 없이 망한 이후 관계 형성을 할 필요가 없는 SSM을 찾게 됐다는 고백을 통해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말한다. 잉여 자취생 시절 향상된 요리실력에 대해 말하다가는 “경제성장의 신화가 깨지고 석유 값이 상승하는 근미래엔 우리 대부분이 다시 요리를 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한다. 


저자의 서술을 읽으며 조금 집요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투명하고 맑다는 인상을 받을 때가 더 많다. 자기 자신마저 철저히 객관화하는 태도, 담담하게 결론을 내는 방식 때문일 것이다. 현실과 구조를 배제한 미담, 거창한 의미부여, 낯간지러운 미화는 이 책에 없다. 그 점이 좋아서 글쓴이에 대한 호감도 깊어졌다.


그러면 뭐하나. 치명적 결함(?)이 있는 걸. ‘본격 잉여 언급 책’인데 <월간잉여> 언급이 없다! 5월 8일 어버이날 한윤형 미디어스 기자를 찾아 이 점부터 짚었다.






잉집장: ‘잉여’란 키워드를 전면에 내운 책인데 월간잉여 언급은 없다.
한윤형: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월간잉여를 모를 때 쓴 것이다. 그리고 나는 잉여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출판사 대표님이 끝까지 포함시켰다. 판매전략의 일환이었던 것 같다.


알겠다. 듣보잡인 게 죄였다... 그런데 사진보다 실물이 훨씬 낫다. 사진빨을 참 안 받는 편이시다.
그런 얘기 많이 듣는다. 사진 전문가에 따르면 안경 문제가 있다고 한다. 내가 잘 나오는 특정 각도가 있는데, 그렇게 찍으면 안경 때문에 눈이 나오지 않아서…. 그리고 원래 사진 찍으면 실제보다 더 살쪄 보이고 눈이 작아 보이지 않나.(웃음)

실물이 더 나으십니다. 레알임.




(중략)

책의 도입에 있는 '등장인물 소개'에 여러 30~40대 지식인들이 간략히 소개된다. 이 때문에 책의 본문에서 이들에 대한 구체적이고 심도적인 얘기가 나올 것 같다는 인상을 주지만 아니었다. 낚시인가 싶었다.
짱짱팬이라서 모 대형서점에서 열린 ‘한윤형과 독자와의 만남’ 행사에 갔었다. 거기서 질의응답 시간에 이에 대한 질문을 드렸더니 “세대론을 얘기하면 꼭 지나쳐야 하는 인물들이다. 이제까지 그들에 대한 글을 썼더니 독자들로부터 네가 말하는 누가 누구인지를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책의 도입에 글에서 언급될 사람들 소개를 미리 썼다. 그런 서사가 있어야 논리적 얘기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런 의도에서 썼다가 괜히 손해 본 것 같다. 예를 들어 진중권은 자신이 등장인물로 등장한다는 것 때문에 아예 책을 안 읽었다고 하던데.
최근에 안 좋게 (서로) 얘기를 나누게 된 부분이 있으니까 책에 자신의 비평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나본데…. 사실 비평을 할 수도 있는 문제지만, 세대론에 진중권이 그렇게까지 중요하게 등장하는 인물이 아니다. 변희재가 나오는데 진중권 얘기가 안 나올 수는 없는 것 아닌가?(웃음) 변희재가 세대론 담론에 뛰어들어 플레이어처럼 행사를 했기 때문에 등장을 해야 하는 것이었고, 그러다보니 진중권을 거론하게 됐던 건데 (오해를 하셔서) 살짝 아쉬웠다. 중앙일보에 서평써주셨으면 판매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을 것 같은데 (웃음) 그래도 트위터에서 그걸 언급해주신 건 자기 팔로우에게 책을 홍보해주시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런 의미에서 살짝 고마워하고 있다.


우석훈에 대해서는 ‘꿈 파는 사람’이라고 평했던데.
너무 추상적인 조언을 많이 하신다. 예를 들어 책에도 썼다시피 20대 국회의원이나 20대 아파트론을 얘기 할 때 “프랑스에도 20대 국회의원이 있으니 우리도 있어야 한다”, “프랑스에도 20대 아파트가 있으니 우리도 있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수준인 것 같아서.(웃음) 프랑스에서는 아파트가 그렇게 좋은 주택이 아닌데 우리한테는 그게 아니잖은가? 그런 맥락적 차이를 고려하지 않고 그냥 제시를 한 다음에, “꿈을 꿀 수 있는 권리도 필요하다.”고 끝내는 식으로 얘기를 하시니까… 좋은 정책제안이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우선순위, 실현가능성, 전략의 차원에서 볼 때 비판의 지점이 많다.


“김난도의 조언을 냉장고 앞에 붙여놓고 삶에 대한 주문을 외우는 어떤 청춘도, 우석훈이나 엄기호의 책을 읽고 위안을 받고 상처를 치유했다 말하는 어떤 청춘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이다. 멘토는 추상적인 단언이 아니라 멘토링이란 활동에서 나올 것이니, 나는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이들의 시도가 지속되는 활동을 통해 업그레이드 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계속 이들에게서 위안을 얻기를. ”이라고 책에서 말했다. 그럼 지금 하는 일도 누군가의 위안을 위한, 일종의 ‘멘토링’ 활동인가?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멘토라는 개념을 따져보면 특정영역에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다. 가령 나는 저자니까 출판계나 언론계에 대해서는 적절한 조언을 할 수 있겠지만, 인생에 대해서라든지 추상적인 조언은 사실 원래가 (웃음) 답이 없는 영역이지 않은가? 그런데 멘토가 원래의 뜻과는 다르게 대중 강연 식으로 소비화된 상품으로 나오다보니, 모든 영역에서 조언을 해주는 그런 세태가 된 것인데, 나는 그런 멘토링이라는 활동을 메타적으로 보는 시선에서 쓴 것이었다. 게다가 멘토링이라는 것이 권위를 인정받아야 할 수 있는 건데, 나는 아마 안 될거야…. 뭐 내가 멘토링을 메타화 해서 쓴 것이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되고 그런 지점이 있을 수는 있다고 본다.


엄기호를 멘토로서 좋게 평가하셨다.
책에서 엄기호를 음유시인이라고 평했다. 현장에서의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데 특화된 저자고, 나쁜 말을 잘 안하기에 <로도스도 전기>(일본작가 미즈노 료의 판타지 소설이다)의 음유시인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자는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시대의 상황을 잘 이해한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본인만의 통찰력이랄까 그런 게 많이 반짝반짝하지 않다는 거? 하지만 이런 사람이 좀 더 많아져야한다고 생각한다.


왜 많아져야 하는 건가? 가령 변희재스럽게 말해보자면, 이런 것을 잘 들은 후 그것을 모아서 20대 이야기를 '대신' 말해주는 486을 찾을 게 아니라, 20대가 더 활발하게 직접 말하고, 기성세대는 이것을 주의깊게 들어주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드는 게 더 바람직 할 수 있지 않을까? 기성 언론들은 젊은 저자들에게 더 많은 지면을 주고.
실제로 주려는 노력을 하고 있긴 한데… 그냥 공간을 연다고 정제된 발언이 나오는 건 아니다. 즉자적인 경험을 얘기하는 것과 자신의 경험을 사회와 역사의 맥락에서 얘기하는 건 다르기에 연습과 훈련을 할 필요가 있다. 자기객관화를 해서 내 얘기를 하는 연습이 우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내 책을 읽고 청년들이 자신의 얘기를 조금씩 덧붙여 리뷰를 쓰던데, 이런 경험들을 이끌어 내는 것이 소중하지 않은가, 생각한다.


독자와의 만남에서, 당면하고 있는 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파편화된 삶의 경험을 넘어서는 서술과 공감의 작업’이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예전에<개청춘>에 대해 쓰셨던 글이 생각났다. 그 글의 일부를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만약 백만 개의 셀프카메라가 있다면 우리는 백만 개의 삶을 찍게 될 것이고, 누가 20대를 대표하는가 따위의 객쩍은 질문도 사라질 것이다. (중략)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버텨간다. 그 버티는 삶 속에 '너희들은 희망이 없다'는 김용민의 충격요법과 '너희들은 실은 출중한 능력을 지니고 있으니 나와 함께 진중권을 쳐부수자.'는 변희재의 달콤한 독약은 개입할 수 있는 맥락이 없다. (중략) <개청춘>을 통해 이전에 있었던 것과 이후에 있었던 것을 조망할 수 있는 하나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20대들이 자신의 삶에 대해 발화하는 과정은 20대의 삶과 한국 사회의 정치적 미래를 위해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다.” 이 얘기는 월간잉여에 해당되는 얘기기도 한 것 같다. 월간잉여 칭찬해주세여.
월간잉여가 열혈독자들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셀프카메라를 보는 경험이 주는 인식의 쾌락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래서 좀 오래 지속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한 개인의 미래를 생각하면 또 계속 하라고 하기도 뭐하고….(웃음)


신간 책날개의 저자소개문 중 “2008년 촛불시위 이후 ‘20대 논객론’이 유행하면서 ‘멸종해가는 게시판 키보드워리어’ 처지에 두어 명의 또래와함께 ‘20대 필진’으로 호명되었다. 그때 불러주는 매체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부모님이 원하는 ‘중간계급의 계급재생산’에 실패한다. 그 때 ‘이 짓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돌이킬 수 없겠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지만 멈출 수 없었다. 지금도 그 사실을 후회해야 하는지 안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중략) 질풍노도의 이십대를 지나 드디어 서른 줄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에 위안과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중년이후의 내 삶’을 상상하면 아득해진다.” 부분이 참 마음 아프면서도 공감됐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내 미래를 걱정해주시는 건가?(웃음)
뭐. 비슷한 거다.(웃음)






※한윤형터뷰 전문은 월간잉여 13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