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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배알도 없이 괴로움도 없이 (정문정)

부제: 소설가 김중혁과 뮤지션 송재경(9와 숫자들)에게 독자적 잉여멘탈을 배움

 

잉집장님이 친잉여적 세상을 원하시고, 박근혜 대통령님이 국민행복시대를 열어가겠다고 천명하셨으니까 그런 세상이 오는데 도움이 될 법안을 제안하겠다. 대통령 각하! ‘동창회 금지법안물 안궁 자랑 금지법을 제정해주십쇼! 특히 동창회에서 지 자랑을 하면 괘씸죄로 가중처벌 해주십쇼!


최근 설을 맞아 고향에 내려갔다. 친구들을 오랜만에 만났는데 주제는 이 정도로 정리됐다. 사랑과 오르가즘과 결혼과 일과 돈. 확실히 이십대 후반이 되니 친구들과의 대화 주제는 결혼에 대한 고민 투 샷에 돈 두 스푼, 회사 한 스푼 정도로 휘휘 저어졌다. 친구 A는 벌써 3천만원을 모았고 결혼할 남자가 있는 B는 부모님이 집을 사줬단다. C는 공무원이라 평생 국민연금이 나온다고 노후 걱정이 없다. 오 좋겠당 오 부러웡 하며 잘 놀고 왔는데 문득 잠들기 전 내 꼴이 낯설어 보였다. 나는 운 좋으면 푸어 노인이고 운 나쁘면 푸어 독거 노인일 텐데. 심지어 이번에 토크해보니 다들 양다리를 걸치거나 클럽을 가거나 어장관리를 하는 다이나믹 연애 라이프에 오르가즘도 자주 느끼는 적극적 섹스 라이프를 즐기고 있었다. 도대체 왜 난 죽으면 어차피 썩어 없어질 몸뚱아리를 이렇게 아끼고 있는 건가? 이제부터 문란해질테다. , 그럼 이제 뭐부터 하면 되는 거지.


얼마 전에는 친구K와 함께 술을 먹다가 "L이랑 나랑 젤 친해. 졸업하고도 같이 PD 준비했었잖아. L 방송사 합격 소식 듣고 내가 걔 엄마 다음으로 많이 울었을 걸" “이야, 진짜 훈훈한 우정이네. 그렇게 감동적이디?” “아니. 너무 배 아파서” “ㅋㅋㅋㅋㅋㅋ이런 대화를 했는데 진심으로 공감했다. 아무리 좋은 우정이라도 이런 상황에선 순수한 마음으로 축하만 하기 어렵다. 비슷한 목표를 향해서 비슷하게 달려왔을 땐 친구의 히스토리를 다 알기 때문에 별 차이 없어 보여서(심지어 내가 더 나아보이기까지 해서)더 속상한 경우가 많다.

 


먼 미래를 보지 마시오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면 소설가 김중혁을 소개하고 싶다. 사실 그는 사람이 아니다. 약사여래불로서 이 세상에 잠시 내려와 미천한 중생들의 쓸모없는 집착과 시기를 사라지게 해주고 있다. 왜냐고?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겠다. 김중혁은 소설가 김연수, 시인 문태준과 김천 출신으로 중고교를 함께 나온 절친이다. 그게 어때서 그러느냐고?


김연수가 누구인가. 그는 2001년 동서문학상, 2003년 동인문학상, 2005년 대산문학상, 2007년 황순원문학상, 2009년 이상문학상을 받았다(심플하게 수상 내역만 썼는데도 이 길이다. 그래서 김중혁은 김연수에게 다상 선생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문태준은?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7년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한마디로 둘 다 참 대애단한 사람들입니다.






글쓴이와 김연수 (잉집장 주: 글쓴이는 김연수 짱짱팬이라고 합니다.)






이들과 수십년을 함께 문학 공부를 한 김중혁은 2000년에 등단했는데, 김연수는 소설로, 문태준은 시로 그보다 6년 전인 1994년에 등단했다(심지어 김연수는 시로도 93년에 등단했다). 그리고 등단 후 둘 다 저마다의 영역에서 금세 한 봉오리씩을 꿰찼다. 그런 단짝들을 보는 기분을 상상할 수 있는가? 김태희와 송혜교를 단짝친구로 둔 배우 지망생의 심정이라니. 김중혁은 그때에 대해 에세이 <뭐라도 되겠지>에서 나에게는 아무런 재능도 없는 줄 알았다. 아무것도 되지 못할까봐 자주 두려웠다고 썼다. 그렇다. 그런 상황에서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이 의심하지 않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려웠을 것이다.


김중혁은 잉여였다. ‘평범이라는 단어를 이마에다 문신으로 새기고 다녀도 사람들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남자였다. 게다가 지방 대학 출신인 데다, 쓸모없기로 유명한 국어국문학과 출신이며, 특별하게 글을 잘 써서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뭐라도 되겠지)’ 그러다 2000년에 등단했지만 언제나 김연수의 친구로 소개됐다. 책을 냈다 하면 상을 받는 친구들과는 달리, 등단 10년 만인 2010년에야 젊은 작가상을 수상했다.


그 좌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걸어온 데는 그의 이런 마인드가 뒷받침됐다. 먼 미래를 보지 않는 것. ‘딱 하나 잘한 게 있었다. 앞날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도대체 뭘 믿고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앞으로 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고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왜 그랬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미래가 너무 불투명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므로, 에잇, 그럴거면 차라리 보지 말자, 라는 생각으로 현재에 충실했던 것 같다. 나는 그저 그런 학생으로 지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는 데 온 힘을 기울였고, 그저 그런 청년으로 살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 하려고 노력했다.’



 

묵묵히 너의 얼레를 감아라

김중혁처럼 주변과의 비교에서 살아남아 자기만의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9와 숫자들의 송재경(9)이다. 중학교 때 HOT 빠순이였던 이래로 처음 이 나이에 팬질을 하고 있는 밴드인데, 송재경 그는 알면 알수록 멘탈을 넘겨짚으면서 감탄하게 된다. 1981년생인 송재경은 서울대 출신으로 같은 서울대 출신인 장기하(1982년생)와 브로콜리 너마저의 덕원(1982년생)과 어울리며 함께 음악을 했다. 송재경은 중학교 때부터 기타를 치기 시작했고, 고등학교 때는 시를 쓰면서 싱어송 라이터로서의 내공을 쌓기 시작했다. 대학에 올라와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다는 덕원은 캠퍼스에서 송재경의 공연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한 라디오에서 말한 바 있다. 2005년 발매된 앨범 <관악청년포크협의회>는 붕가붕가레코드의 곰사장이 제작하고, 덕원과 송재경 등이 참여해 노래한 컴필레이션 음반이다. 그리고 2007, 송재경의 밴드 그림자궁전이 나왔다. 혁신적 음악이라는 표현이 뒤따랐고, 그는 홍대인디씬에서 큰 주목을 받는다.


그런데 상황이 곧 역전된다. 덕원은 브로콜리너마저를 결성하고 2007년 첫 EP <앵콜요청금지>를 내고, 2008<보편적인 노래>로 아주 보편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송재경은 처음에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음악을 인정할 수 없어서 듣지 않았다고 말한 적 있다. 장기하는? 설명할 필요도 없이, 2008'싸구려커피'장기하 신드롬을 일으켰다. 장기하가 장기하와 얼굴들이라는 이름으로 나오자 ‘9와 숫자들은 장기하를 따라한 게 아니냐는 질문을 받아야 했다. 그때 송재경의 기분은 어땠을까?


2009년에 나온 9와 숫자들 1집에 수록된 노래가 그의 심경을 짐작케 한다.


오 난 갑자기 가슴이 콱 막혀요 / 모두 각자의 갈 길의 찾아내는데 / 너무 깊게 판 나의 우물 속에서 / 물 한 방울 안 나오면 나는 나는 어떡해(<칼리지 부기> )’


그는 이런 고민 속에서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아 낸 것 같다.


당신의 고마운 말들과 / 벗들의 속 깊은 배려도 / 밝혀줄 수 없는 내 속의 어두운 공간 / 사실 그리 대단할 것도 없는데 (중략) 푸르른 젊음의 하늘 위로 어여쁜 연을 띄웠죠 / 바람이 질 세라 / 난 바삐 얼레를 풀고 / 텅 빈 들판 위를 한 없이 달렸네 // 에헤라디야 내 연을 보아라 / 상식도 없는 이 세상 / 너 혼자 똑똑해서 뭐하려구 // 에헤라디야 내 연이 난단다 / 묵묵히 너의 얼레를 감아라


송재경은 이 곡을 자신에게 불러주는 노래라고 말했다. 이 노래는 '너 혼자 똑똑해서 뭐하'겠냐만 아무도 안 알아준다고 해도 묵묵히 하면 된다는 식의 응원이다. 그는 묵묵히 얼레를 감는 것이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한다. 화려해 보이는 연, 높이 올라가는 남의 연을 쳐다볼 시간에 자신의 손에 쥐어진 연에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묵묵히 감다보면 뭐라도 되겠지

송재경은 그림자궁전에서는 스스로 자연스럽지 못한 음악을 하고 있었다면서, 편안한 음악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그렇게 2009년에 나온 9와 숫자들의 첫 앨범은 2010<한겨레> 대중음악 연말결산에서 평론가들이 꼽은 올해의 앨범의 영예를 안았다. 2011년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모던록 음반으로도 선정됐다. 2012년에 나온 EP ‘유예는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음반 등 4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다. 20132집이 나올 예정이라는 9, 더 가뿐해 보이고 더 여유로워 보인다.


김중혁은 2011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12년 이효석 문학상을 이어 수상하며 승승장구하고 있다. 등단작이 곧 대표작인 조루 작가들이 넘치는 세계에서 그는 자신만의 속도로 가고 있고 점점 더 좋은 글을 써내는 독특한 포지션의 작가다. 그는 자신있어한다. 김중혁은 이렇게 말한다.


마흔이 되어보니 이제 뭘 좀 알겠고 이제 뭘 좀 해볼 만하다 싶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나이가 된 것 같다. 이제부터는 계급장 떼고, 스펙 떼고, 출신 학교 떼고, 제대로 한번 붙어볼 생각이다.’







김중혁 뭐라도 되겠지 (2011, 마음산책)





세상에는 대단한 사람들이 많고, 그들을 나와 일일이 비교하다 보면 언제나 도달하는 결론은 비슷하다. 사람들이 뭔가를 그만 둘 때 가장 합리적이라고 생각해 무난히 쓰는 말, “나는 역시 재능이 없어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요즘 생각한다. 제일 중요한 것은 어쨌든 계속 하는 것이다. 재능이 있어서 하는 게 아니라 하다 보면 재능이 생기기도 한다. 그리고 꾸준히 하는 것이 제일 큰 재능이다.


고등학교 때 학교 대표로 전국 문학대회에 친구와 나갔다가 친구만 수상하고 나는 빈손으로 돌아 온 적이 있다. 그 날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서 옆자리의 친구는 계속해서 부모님과 선생님과 친구들과 통화를 하고, 나는 자는 척 하던 날의 비참함을 떠올리면 지금도 으슬으슬 오한이 든다. 그날 밤 역시재능이 없었던 거라고 결론을 내리고 문학부를 탈퇴하기로 마음먹었다가 울면서 그래도 그냥 가자고 생각하던 번복도 떠오른다. 10년이 지났고, 어쨌든 지금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물론 지금도 나를 문득문득 의심하지만 어쨌든 이렇게 살아 있다. 다들 그러니 살아남으십시오. 월간잉여도, 잉여님들도. , 그럼 저는 이만 문란해지러 가겠.

 











(격)월간잉여 1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