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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잉각색

나는 유령이다 (오다리 유령)




 꼬마 유령 캐스퍼 Casper, 1995




하나의 유령이 서울을 배회하고 있다.


나는 12년의 공교육을 마치고, 서울 소재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 다행히도 나를 어엿비봐 주었던 회사가 있어 졸업 후 바로 취직이 되었다. 1년 간 기획, 온라인 마케팅, 영업, 무역실무, 쇼핑몰 관리, 홈페이지 관리, 해외출장, 회원 관리, 문서 작성, 회계, 물품 배송, 창고 정리 등의 업무를 담당했다. 직원은 혼자였다. 나는 아직도 쓴웃음을 짓고 있다. 결국 과중한 업무와 발전 없는 커리어를 이유로 일을 그만두게 됐다


나는 모아놓은 돈으로 컵닭과 초코우유를 사먹고, 여자친구 집에 빌붙어 밥 먹고 자고, 도서관 가서 책을 본다. 가끔 몰아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몰아서 삶을 즐긴다. 또 농업협동조합에 채무가 있다. ‘정부보증학자금대출을 받아 매달 10만 원 가량의 이자를 공돈으로 버린다. 이 협동조합은 조합원이 아닌 나에게도 돈을 쓰라고 했으며 처음부터 내 상환능력을 평가하지도 않고 정부가 보증했다는 이유로 내게 돈을 빌려주었다. 정부는 나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나 보다.

 




나 여기 있어

그럼 내 하루를 살펴보자. 가만, 그런데 하루가 언제 시작되더라? 아침부터 시작되어 밤에 끝나는 하루는 바쁜 현대인의 하루인데, 나는 바쁘지도 않고 현대인의 기준에도 맞지 않으니까 내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는 것으로 해 본다.


여자친구 손을 잡고 여자친구네가 있는 동네를 어슬렁거리다 10, 11시가 되면 슬슬 여친 집으로 들어간다. 단독주택인데 대문 위를 슬쩍 보면 누가 있는지 알 수 있다. 불이 켜져 있으면 여친 여동생이 있는 거다. 여친 동생은 보통 자기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거나 문을 닫고 큰 방에 있다. 다만 인기프로그램인 ‘OOO’을 하는 날이면 거실에 앉아 있는데 이 때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1초간 고민하지만, 인사를 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친 동생도 가만히 있네 이거? 여친 동생시선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그래도 곁눈질로 보면 여친 동생은 제자리에 꿈쩍 않고 있다. 난 쏙 여친 방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는다.


여친 동생은 여친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르다. 조용하고 뭔가를 집중하며 열심히 한다. 그러다 가끔, 아주 가끔 방귀를 시원하게 한다. 서글프다. ‘나 여기 있어.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여친 방과 동생 방은 원래 한 방이었는데 가운데를 막아 나눈 거라서 소리가 아주 잘 들리는데난 모르는 척, 내가 없는 척 조용히 책을 본다.

11시쯤 일어나서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린다 싶으면 옆에서 여친이 자고 있다. 큰 방에서 여친, 여친 어머님, 여친 동생이 함께 자다가 여친 어머님과 동생이 나가면 쪼르르 들어오는 거다. 그래서 밤엔 마음 놓고 키스도 못한다. 쪽쪽 소리 내다가는 금방 들키니깐.


자다 보면 부엌이 분주하다. 여친은 벌써 일어나서 점심 준비를 하고 있다. 백수 주제에 점심 대접이라니. 나는 사양하지 않고 찌개, 김치, 갓 지은 밥, 계란 반찬, 마른 반찬, 김 등으로 나름 성대한 점심식사를 한다. 이럴 때 정말 행복하다. 그래서 난 설거지를 자청해서 한다. 싱크대도 행주로 물기 없이 깨끗하게 닦아 놓는다. 행복하니까.

그러나, 갑자기 불안함 마음이 뇌리에 번뜩 스쳐 지나간다. , 여친 아버님이 오시면 어쩌지? 아버님은 딸 둘이 불편해 할까봐 집에 거의 오지 않고 가게에서 지내시고, 가끔 목욕하실 때만 들르신다. 여친 어머님은 아버님이 집으로 향한다 싶으면 즉시 딸에게 문자를 보내 나를 집에서 내보내게 하신다. 만일 여친 핸드폰이 꺼져 있거나, 갑자기 아버님이 들이닥친다 싶으면 나는 숨는다. 책상 밑에 숨을까? 한 번은 아버님이 갑자기 오셨을 때 불을 끄고 책상 밑에 숨어보려 했지만 공간이 작아서 그냥 문 닫아놓고 숨죽여 있어야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방 불 끄고 문 뒤에 가만히 앉아 있는 거다. 그러다 아버님이 씻으러 욕실로 들어가시면 재빨리 양말바람으로 집을 나간다. 휴우 선방이다….


점심을 먹고 나면 아버님 오실까봐 가까운 도서관으로 가서 마음을 놓는다. 책을 보고 진짜 가끔 취업정보를 들여다보지만 왜 이리 시시할까? 멋지고 재미있는 일이 도무지 없다. 이제는 일을 내게 맞추면 안 되고, 내가 일에 맞춰야 할 때인가? 이런 고민을 하다보면 책이고 뭐고 눈에 안 들어온다. 어깨는 펴지만 눈은 흐리멍텅하게 다시 여자친구네 동네로 어슬렁어슬렁 들어간다.

 






 반달곰 No Cave, 2012





유령의 꿈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무얼 하든지 직장은 곧 잡아야 하고, 집도 얼른 구해야 하며, 하고 있는 공부들을 더 구체화시켜야 한다. 학자금도 이자 더 붙기 전에 빨리 갚아야 하고, 가족, 친구, 지인에게도 잘 해야 한다. 한 마디로, 좋은 인간으로 남아야 한다. 남은 건 의무뿐이다. 하지만 태어난 지 30년 된 지금의 나는 학교에도, 직장에도, 가정에도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한 친구는 나를 유령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아무에게도 주목받지 못하는 유령. ‘나 여기 있다고 라고 말하고 싶은 유령.



그럼에도 나는 이런 만행을 고백한다. 우리가 유령이고 싶어서 유령이 된 건 아니지 않은가? 당당해야 한다. 여친 집을 내 집처럼 드나들자. 누구도 인사하지 않고 누구도 봐주지 않아도 밥을 먹고 화장실을 쓰고 방귀를 뀌자. 유령도 고기 먹고 방귀 껴서 냄새가 독하다는 걸 알리자. 나 여기 있다고 말하자. 이런 만행이 널리 퍼져 나가서 유령끼리 서로를 알아가면 좋겠다. 유령이 유령 맘을 알아주지, 인간이 유령 맘을 알아주겠나? ?

그러니까, 만국의 유령이여, 단결하라!

 










(격)월간잉여 1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