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의 고백 (도인호)

 

- 2013년, 마포구 서교동 독막로 7길 GS 25시

 

나는 낙서를 수집하는 사람이다. 특히 서울의 낙서를 모으고, 그것을 D:드라이브에 차곡차곡 정리하여 뿌듯함을 느끼며, 가끔은 그것에 관해 글을 쓰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삼성의 이건희는 슈퍼카를 수집하는 것이 취미라 하고 그의 아내는 세계의 파인아트를 모으는 것이 취미인 사회에서, 나는 낙서수집이라는 것을 취미로 삼고 있는 것이다. 취미 혹은 취향이란 언제나 각자의 상황에 맞게 가지기 마련이다.

그러다가 우연히 [월간잉여]라는 재기발랄한 잡지를 발견했을 땐, ‘어머, 여기엔 글을 써야해!’라고 생각했다. ‘잉여’라는 웃픈 단어에 스스로가 가까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아마도 월간잉여의 열렬한 구독자들)에게 나의 잉여스러운 작업을 공유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신들의 친근한 공감과 따듯한 위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얄팍한 예감이 들기도 하였다.

이러한 뜻을 잉집장에게 수줍게 전달했더니, 그녀는 ‘낙서는 무엇이며 왜 낙서를 수집하는지. 그것이 왜 잉여짓이며 잉여짓임에도 불구하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라는 몹시 터프한 질문을 했고 대답이 될 만한 글을 써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누구에게도 그런 질문을 받아보지 못했으며 스스로도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당황스러웠지만 한편으로는 무척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관심 받는 기분이었다. 아무튼 며칠간 찬찬히 고민해보았는데, 내가 낙서를 수집하게 된 두 가지 큰 계기와 그것에 회의를 느꼈던 한 가지 사건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면 어떨까 싶었다. 만족할 만한 대답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딘가에서 낙서수집과 비슷하게 잉여스러운 작업을 하고 있을 청춘잉여들에게 도움이 되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 2009, 종로구 관훈동 38번지 쌈지길 지하 1층 화장실

 

계기 1 : 우리의 시대

첫 번째 계기는 뜻하지 않게 찾아왔다. 때는 2006년 군 입대를 앞둔 여름이었고, 나는 삶의 의욕을 상실한 채 잠실역 화장실 두 번째 칸(양변기가 설치된)에서 볼일을 해결하고 있었다. 볼일이라고는 그 정도 밖에 없었던 비루한 청춘이었다. 그러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아 낑낑대고 있는데, 눈앞에 화려한 음담패설이 가득한 ‘화장실낙서’들이 눈에 띄었다. 야한 낙서들을 접해본 적은 많았지만, 그 날처럼 어마어마한 욕정이 배설된 낙서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나는 크게 충격 받았지만, 이내 매혹되어 장시간 그 낙서들을 탐닉하고 말았다.

그리곤 곧바로 입대를 하여 포상휴가를 위해 전국노래자랑에 나가기도 하고, 그렇게 얻은 휴가에서 여자친구에게 실연당하기도 하는 등의 뻔한 군복무를 마친 2008년, 나는 또 잠실역 화장실 두 번째 칸에서 볼일을 보고 있었다. 2년 전 경험했던 강렬한 낙서의 추억이 나를 두 번째 칸으로 인도했던 것이다. 날 경악케 했던 낙서들은 지워져 있었지만 그 대신 또 다른 충격적인 낙서들이 그곳에 새롭게 채워져 있었다. 그것은 게이들의 이야기였다. 누군가가 ‘파트너’를 찾는다며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적어놓았고, 댓글 형식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게이들의 사랑법’에 대하여 자세히 서술한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그 두 개의 낙서를 중심으로 게이문화에 대한 활발한 ‘낙서토론’이 이어진 것이었다. 대부분 원색적인 조롱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지들이 좋아서 한다는데 네들이 뭔 상관이냐’는 식의 미미한 지지의 글자들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 소모전(요즘말로 병림픽)을 바라보며 문득, 낙서가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했다. 2006년의 대한민국 사회보다는 2008년 쪽이 성적소수자에 대한 담론을 더 많이 이끌어내고 있었고, 잠실역 화장실 두 번째 칸의 낙서들이 그것을 반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나친 비약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지난 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대선을 겪으면서 나는 어쩐지 확신을 얻게 되었다. 나경원의 딸과 박원순의 아들. 안철수와 strong man's daughter에 관한 금기 없는 낙서들을 보면서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그 낙서들이 선거에서 민심의 지표로 활용되지는 않았다. 쓸모없는 정치잡담으로 치부되었고, 한편으로는 그것이 합리적인 분류법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 2008년,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2동 139번지 송파중학교

 

계기 2 : 도시의 뉘앙스

두 번째 계기는 잠실역 화장실 사건과 연달아 발생했는데, 집 앞 중학교의 낙서와 특별한 감성을 공유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그것은 ‘요상하다’라는 형용사와 ‘형’이라는 명사가 합쳐져서 묘한 느낌을 주는 글귀에, 초록색 스프레이가 뿌려져 있어 마치 외계인이나 해파리를 연상시키는 낙서였다. 처음에는 ‘참 요상한 낙서네’라고 생각했지만 그 낙서를 만나는 빈도수가 높아질수록 나는 그 ‘형’과 친해지게 되었다. 버겁게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항상 형이 있었고, 그를 볼 때마다 고향이 주는 따뜻하고 친근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9년의 초봄, 그 요상한 형은 실종되었다. 형이 살던 그 중학교는 새 학기를 맞아 ‘거리환경미화’를 실시했고, 그가 있었던 익숙한 자리는 골인 지점을 통과하는 마라톤 선수의 모습으로 덮여졌기 때문이다. 형이 사라진 담벼락을 보는 것은 무척 서운한 일이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얄미운 마라톤선수를 하염없이 째려보기만 하였다. 결국 낙서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종류의 것이었다!

형의 실종은 낙서수집의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 사건 이후로 나에게는 걷는 일이 생길 때마다 ‘제 2의 요상한 형’을 찾아보는 버릇이 생겼고, 그것들이 사라질 때를 대비해 사진 찍기를 시작했다. 보통 쾌쾌한 이태원 뒷골목의 술집이나, 매끈한 홍대의 클럽 등에서 청춘을 소비했으므로 수집한 것들의 중심무대는 서울의 이곳저곳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D:드라이브에 낙서들이 쌓여가면서 어느새 나는 낙서수집이 취미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개인적인 심상이지만 ‘제 2의 요상한 형’들에게는 한 가지 희미한 공통점 있었는데, 낙서가 있는 주변 환경에 뉘앙스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었다. 홍대의 거리낙서에는 치기어린 젊음의 냄새가, 쌈지길의 담벼락낙서에는 수줍은 사랑의 설렘이, 어느 대학이든 도서관낙서에는 취업압박의 치열함이 배어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낙서수집이라는 것이 서울의 지리멸렬한 뉘앙스를 포착하는 굉장한 작업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흥분된 마음으로 이 위대한 계획에 대해서 엄마에게 고백했을 때, 엄마는 조금은 걱정된 눈빛과 조금은 미안한 웃음으로 삼성에 취직했다는 친구아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 서대문구 냉천동 독립문로 8길 금화시범아파트 3동

 

회의 1 : 하지만 나는.

마지막 사건은,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맞이했던 2012년의 겨울에 일어났다. 나는 하던 사업을 정리하고 [서울의 낙서]라는 블로그를 개설해 낙서에 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모아놓은 돈이 별로 없기 때문에 취직준비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었겠으나 젊다는 것의 특권이 아주 조금이라도 남아있었을 때, 이것을 가지고 뭐라도 해보고 싶었다. 낙서를 찍으러 다니는 날과 포스팅을 하는 날을 정해 꾸준히 블로그를 운영했고, 운이 좋아서 네이버 메인에 노출되기도 하고 좋아하던 잡지 [페이퍼]에 내 글이 실리기도 하였다.

그렇게 블로거로서 하루하루가 충만하던 어떤 날에, 1971년에 지어진 특정관리대상 E급 시설(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금화시범아파트에 가게 되었다. 아주 오래된 아파트라면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낙서들이 많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을 했다. 예상대로 아주 좋은 낙서들을 수집할 수 있었지만, 아무도 살지 않는 그 을씨년스러운 아파트에서 나는 이제껏 겪어보지 못했던 공포를 경험하고 있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아파트가 심하게 흔들려서 이곳이 곧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했고 갈 곳 없는 만취 노숙자가 해코지를 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영혼을 잠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물스물 올라오는 공포를 꾹꾹 누르며 30분 정도 낙서를 수집하고 비로소 1층으로 내려오는데 갑자기 어떤 검은색 물체가 내 앞으로 튀어나왔다. 나는 그야말로 까무러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악’소리도 내지 못할 만큼 참기 힘든 공포였다. 그러나 그 검은색 물체라는 것이 결국 작은 고양이였으니 누군가 나를 봤다면 몹시 재밌는 볼거리였으리라. 정신을 차리고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나는 계속 냉천동의 허름한 아파트에 앉아 있었다. 여기서 도무지 뭘 하고 있는 걸까. 나의 청춘이 비참하게 느껴졌다.

- 서울특별시 송파구 오금동 51 오금공원

이 글은 ‘낙서수집이란 잉여짓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래, 낙서수집이란 과연 잉여짓일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를 구분하는 기준을 ‘이윤창출’로 규정하고 있다면 낙서수집이라는 것은 확실히 잉여노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블로그를 운영하며 창출해내는 광고수익이라는 것이 하루 평균 고작 360원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깐 누군가가 자본의 논리로 나의 수집을 조롱한다면 나는 전혀 할 말이 없으며, 더 나아가서 나 자신조차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잉여스러운 취미라며 낙서수집을 소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억울한 감정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위의 글에 구구절절 이야기했듯이 나에게 낙서수집이란 특별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윤창출이라는 고고한 기준이 낙서수집의 ‘특별함’을 ‘잉여스러움’으로 변질시킨다고 사고하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냉천동 사건 이후에 [토익인강매출 1위 영어단기학교]에 수강신청을 했으며 괴롭지만 열심히 수강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싶다. 또한 동네공원에 산책을 갔다가 발견한 ‘LOVE YOUR SELF’라는 낙서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는 것도 이야기해야겠다. 그리고는 사진을 잘 찍을 수 있도록 포즈를 취했고 D:드라이브에 소중히 백업해놓았으며 여전히 좀 억울한 기분이 찾아들었다. 그래, 낙서수집이란 과연 잉여짓일까.

※ (격)월간잉여 1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