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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인생도 돌죽도 (이지성)


 

던전 크롤 - 스톤수프(Dungeon crawl - Stonesoup) 간단히 줄이면 돌죽(Stone Soup).

평소에 디시질 좀 하는 노-라이프 게이머라면 아마 들어본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97년부터 지금까지 여러 아마추어 개발자들에 의해 개발되어 온 이 게임의 목적은 아주 간단합니다. 27층으로 구성된 던전(동굴이나 미궁 비슷한 곳)의 끝까지 내려가 보물 하나를 들고 나오는 것. 여기엔 별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보물이 세상을 구하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지 누군가의 사리사욕을 챙기기 위한 것인지는 모른 채 그저 길을 가로막는 적은 죽이고 또 죽이면서 보물을 가져오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허무한가요? 하지만 어쩌면 게임은 그 보물이 어떤 힘을 갖고 있을지 플레이어가 직접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릅니다.

 

돌죽에는 다른 게임과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이 게임의 정체성(?)이라 할 수 있는 이 특징들 때문에 돌죽은 조금 특별한 게임이 됩니다. 혹시 불러오기 신공이라는 말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게임에서 중요한 순간 게임을 저장한 후에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올 때 까지 불러오기를 반복하는 것을 흔히 불러오기 신공이라고 합니다. 사실 저도 이 불러오기 신공의 애용자 중 한명입니다. 특히 삼국지 같은 게임을 할 때면 제갈량 같은 인물을 아군으로 만들기 위해 수십 번씩 불러오기를 하곤 했었지요. , 말 나온 김에 첨언하자면 삼국지는 5편이 정말 재미있어요. 개인적으로 삼국지 특유의 고풍스러운 느낌을 갖고 있던 마지막 작품이 아닌가 싶어요. 음악도 너무 좋죠 :)

 




죽었다더도 덜도 없이 저 한마디가 끝이다. 아 살 수 있었는데! 언제나 죽은 뒤에야 살 길이 보이기 마련이다.


, 그럼 돌죽은 어떨까요. 간단히 말하면 그런 거 없습니다. 일단 무슨 행동을 하면 그 순간 자동으로 저장 파일에 기록되기 때문에 이전 상황을 다시 불러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 흉악한 함정을 밟거나 자꾸만 배가 고파지는(!!) 저주받은 반지를 실수로 끼더라도 돌이킬 수 없는 것이지요. 이건 죽었을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죽에는 캐릭터가 죽을 수 있는 오만가지 방법이 있어요. 꼭 싸우지 않더라도 굶어죽거나, 물에 빠져 죽을 수도 있고 조금 심한 경우에는 숨 쉬는 법을 잊어 버려서(!) 죽을 수도 있죠. 그러나 그런 것보다 중요한 건 역시 이 죽음이 영원한 죽음이라는 점입니다. 그래요. 실수로 키보드를 잘못 눌러 죽었든, 철부지 동생이 멋모르고 움직이다 죽었든 상관없어요. 일단 한번이라도 죽으면 그 캐릭터는 삭제되고 게임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입니다. 애지중지 키운 캐릭터가 허공으로 사라질 때의 그 허무함, 내가 대체 지금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싶은 공허한 느낌이 돌죽에서 벌어지는 가장 흔한 일상이더군요.

 



저 물약이 정말 치료 물약일까? 이럴 땐 행운의 여신에게 빌어보자. 손나 예쁜 손나은님 제발 치료 물약을 주세요!



 

조금 매니악한가요. 하지만 여기에 결정타를 가하는 또 다른 특징이 있으니 바로 무작위입니다. 돌죽에서는 던전의 모양에서부터 적과 각종 아이템의 배치까지 아주 많은 부분들이 게임을 새로 시작할 때마다 무작위로 정해져요. 그래서 게임을 직접 해보기 전에는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할 수 없죠. 한번은 일찍부터 좋은 무기를 얻어 일사천리로 진행하기도 하지만, 다음번에는 적이 시작하자마자 그 무기를 들고 나와서 나를 죽이는 웃지 못 할 광경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마찬가지로 각종 물약과 두루마리 등 여러 아이템의 효능도 매 시작시마다 무작위로 정해지기 때문에 직접 사용해보기 전에는 그 용도를 알 수 없습니다. 때문에 이런 아이템들의 용도를 미리미리 알아두지 않았다면 위급할 때 내가 마시는 물약이 무슨 효과가 있는지도 모른 채 운에 모든 것을 맡기고 들이켜야 하는 씁쓸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운에 따라서 상처를 치료해 주는 소중한 물약을 마시고 위기를 벗어날 수도, 반대로 끔찍한 맹독 물약을 마시고 두 배 빠르게 천국으로 직행할 수도 있겠지요.

 

이 두 가지 특징 때문에 돌죽은 그렇게 만만하게 접근할만한 게임은 되지 않습니다. 사실 인터넷상에서는 만만은 고사하고 가혹한 난이도로 악명이 높은 게임입니다. 특히 오랫동안 공을 들인 캐릭터가 실수 한 번에 죽어 없어지는 건 정말 허무한 일이에요. 심지어 억울하기까지 하죠. 정말이지 이렇게 몇 번 캐릭터를 날리고 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산화한 나머지 돌죽 폴더에 Shift + Delete 키를 마구 눌러대곤 합니다. 저도 지웠다가 다시 설치하길 얼마나 많이 반복했는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그럼에도 돌죽이 정말 어렵거나 게임 숙련자만 할 수 있는 매니악한 게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말 게임다운 재미를 갖고 있는 유니크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지요.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보면 (잉여라면) 누구나 돌죽이 가지고 있는 매력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은 잉여력이니까요같이 한번 죽어보자는 게 너무 티가 나나요?

 

확실히 돌죽에서 죽음을 다루는 방식은 가혹합니다. 그렇지만 역으로 그렇게 한번 죽어 보면 게임에서 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이고, 내 실수가 어떻게 죽음으로 직결되는지를 아주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후부턴 어떻게든 죽지 않기 위해 적의 특성, 아이템의 사용법 그리고 내가 가진 기술이나 주변 지형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키 누르는 것도 조금은 신중해 지고요. 어쨌든 그러다보면 가끔은 자기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을 만큼 기발한 방법으로 위기를 돌파할 때도 있습니다. 또 절체절명의 순간, 매번 싸우다 죽기만 하던 선택지에서 벗어나 훗날을 기약한 채 도망치는 방법에 눈을 돌려보기도 하죠.

 

 

게임을 한다는 건 이런 것 아닐까요? 정해진 공식에서 벗어나 스스로 상황을 마주하고 생각하면서 계속 답을 찾아가는 과정 말이지요. 만약 돌죽에서 몇 번이고 불러오기를 할 수 있다면 이런 정의는 성립하지 않을 거예요. 불러오기엔 실패가 없으니까요.

 



본 게임에서 느낄 수 있는 온갖 감정은 그 자체로 감동이다. 외국어로 쓰여져 일반 유저에게는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는 천편일률적인 스토리나, 기만적인 동영상 따위로 강요되는 허위의 감동과는 확연이 그 격을 달리한다. 플레이어는 그러한 감동 - 긴장과 갈등, 공포와 불안, 기대와 실망, 환희와 분노의 교차 -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 다음 층으로, 또 다음 층으로 내려가야 한다. 게임 속에서도 현실에서도 모험에는 끝이 없다.

- 정태룡, 게임공략 3, 1999-

 



1990년쯤 제가 처음으로 접했던 게임은 일본어로 되어 있었습니다. 말은 한마디도 못 알아들었지만 참 재미있었어요. 귀여운 캐릭터가 움직이는 것을 보기만 해도 좋았고 게임 속 마을에서 사람들과 무슨 소린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나누기만 해도 마냥 재미있었죠. 비유하자면 정말 게임 속에 떨어진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에 그 게임을 다시 했을 땐 좀 실망스러웠어요. 캐릭터는 단지 그래픽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저 입력된 대사를 반복할 뿐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다시 그 시절처럼 게임 주인공이 되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죠.

 

돌죽에는 마을도 없고 이야기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게임 속 주인공과 플레이어 자신의 이야기를 일치시킬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게임입니다. 만약 게임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돌죽을 꼭 해보길 권해봅니다. 분명 지금 알려져 있는 게임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물론 인생도 돌이킬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인데 굳이 게임도 돌이킬 수 없는 걸 해야 하냐고 반문하시면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만.

 





(격)월간잉여 12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