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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후 세계에서, 김진수입니다 (김진수)

4학년인 나는 이제 화석수준의 학번이 되어 이래저래 굴러다니고 있다. 혹자는 4학년 이후의 시기를 뜻하는 표현으로 내가 사(4 or 死)후 세계에 있는 거라 말했다.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없이 대학생활을 보낸 탓일까…라고 하기엔 사실 지금도 없다. 글쎄, 기자라는 직업이 이루기 너무 어려워서 지레 겁먹은 탓일까. 아니면 그만큼 절실하지 않은 걸까.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건가…. 나도 나를 모르겠다. 최근 참여했던 취업프로그램 중 하나인 모의이력서를 쓰면서는 하얀 백지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래서 나를 정리하는 시간을 좀 가져봤다.




대학이 뭐길래
수능성적에 맞춰서 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나는 신문방송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영어가 최우선이라고 강조했고, 나는 우여곡절 끝에 영미어문학부라는 곳을 선택했다. 선택이 나쁘지는 않았다(고 생각했다). 영어는 내가 좋아하는 과목 중 하나였고, 외국인 교수가 하는 수업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적어도 듣기실력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학벌. 그놈의 학벌이었다.

내가 다니는 대학은 손꼽히는 명문대학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학교 종교재단이었다. 이 재단에서는 뭐 그리 안 먹는 음식이 많은지 교내식당에서는 돼지고기와 해산물이 들어간 음식은 팔지 않는다. 무려 학교매점에서는 새우깡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술과 커피는 물론이다. 거기다가 종교수업은 뭐 그리 많이 들어야하는지, 무려 7학기를 들어야했다(지금은 6학기로 바뀌었다고 한다.) 갓 스무 살에게 학벌이라는 것만 해도 스트레스인데, 학교가 강제한 종교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는 것은 정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었다. 그래서 신입생들 사이에는 학기 초부터 재수를 한다니, 반수를 한다니 아니면 2학년 때 편입을 준비한다니 하는 얘기가 벌써부터 돌아다녔다. 그래도 현실에 순응하고 학교를 다닌 이들이 더 많다. 스무 살의 자유를 맛본 탓이다. 나 또한 그랬다. (그래도 그때 차라리 지금보다 학과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 같다.)

어느 정도 학교에 적응하고 난 후 바로 대학 학보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선배들과 함께 취재를 하며, 조금씩 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2학년 여름방학에는 한 언론사 대학생 인턴기자를 하게 됐다. 솔직히 좀 놀랬다. 합격생 중 유일한 2학년(21살)이었고, 나를 제외한 다른 합격자들의 학벌은 몹시 뛰어난 편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뽑힌 거지?) 어쨌든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고 생각하고 나름 열심히 했다. 하지만, 나는 너무 해맑았다. 사회생활 개념조차 몰라 선배들 을 속 썩였고 글도 잘 쓰지 못해 만날 아이템(게임 아이템이 아니라 기사 아이템)만 생각하다가 허송세월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생각하면 자다가 하이킥을 할 무개념 짓도 많이 했다. 어쨌든 인턴생활이 내게 남긴 건, 학벌에 대해 뭔가 대책을 세워야겠다는 생각이었다.  평소에도 기자가 되려면 학벌이 좋아야 된다는 말을 숱하게 들었는데, 정말 언론사에서는 학벌 좋은 사람밖에 안 보이는 것 같았다.




등교길에 한 컷 김진수




2년 동안 매진한 대학편입. 그 결과…
군대 제대 후, 내가 첫 번째로 선택한 것은 대학편입이었다. 일종의 학벌세탁을  노린 것이다. 누구나 군 제대 후 대략 3개월 정도는 마치 세상에 나가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을 얻게 되는데, 나 역시 그랬다. 스물 네 살, 갓 전역한 ‘진짜 사나이’ 김진수는 위풍당당 패기로 하루 10시간 이상 공부하면서 정말 열심히 편입 공부에 매진했다.

편입학원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어두운 분위기가 깔려있다. 다들 가슴한편에는 ‘좋은’ 대학을 가지 못했다는 자신만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그들은 마치 그것이 죄인 냥 말했다. 그래서 섣불리 자신이 어디 대학에 다니고 있는지조차 말하지 않는다. 거기다가 편입시험 경쟁률은 몹시 높았다. 인문계 낮은 학과는 60:1, 인기학과는 120:1 정도의 경쟁률이었으니, 다른 인기 전공과목 경쟁률은 어땠겠나. 그 압박감을 이겨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웃긴 건, 대학 편입공부는 정말 쓸모없는 공부 중 하나라는 거다. 보통 편입학시험은 영어(문법, 어휘, 독해, 논리)시험인데, 굳이 알아야 되나 싶은 정도의 잉여스런 단어가 많이 나온다. 공부하는 응시생들조차 쓸모없다는 걸 알면서도 편입합격이라는 목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의 등골을 뽑아 비싼 학원비를 들여가며 잉여단어를 암기한다.

그렇게 1년 동안 압박감을 가지고 공부에 매진한 후, 새해 초에 있었던 편입학시험 결과, 나는 지원한 곳 중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담담한 마음이었지만 아쉬움도 남았다. 그 아쉬움을 달래고자 스물다섯 살 김진수 군은 한 번 더 공부해보기로 결심한다.  군 제대하고 나서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는 것 같아 당분간 휴식을 취하며 다양한 강의를 찾아서 듣기로 했다. <인권언론센터>, <오마이뉴스>에서 강의를 들으며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리고 돌아온 7월. 다시 편입학원으로 돌아왔다. 역시 재수생은 유리했다. 전보다 성적도 더 높게 나왔고, 자신감도 더 붙었다. 하지만… 왜죠? 그 다음 해 시험에서 나는 또 좌절을 맛봤다. 한 군데도 합격하지 못한 것이다. 운도 지지리 없었다. 2년 동안 뭐 했나 싶었다. 후회가 밀려왔다.

그렇게 4년 만에 3학년으로 복학했다. 그게 바로 작년이다. 학기 초에는 약간의 적응이 필요했고, 동기들도 거의 졸업직전이거나 졸업한 상태라 뭔가 외롭기도 했다. 그렇게 새로운 사람들과 공부를 하고, 대학학보사 활동도 다시 시작했다. 근데 정말 버거웠다. 학과 공부는 뭐 그리 재미가 없는지, 동기부여가 되지 않는데 과제는 흘러넘쳤다. 사실 내가 정말 배우고 싶은 게 영어가 아니라는 것도 깨달은 탓이다. 상황이 그렇다보니 학점을 꼭 잘 받아야 한다는  이유도 찾지 못할 정도로 무기력해졌다. ‘그냥 중간만 받으면 되는 거 아님?’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4년만의 복학의 첫 학기는 나에게 사상 최초 2점대라는 평점을 선사했다.



무기력한 세월을 보내다 <월간잉여>를 만났다. 기자 지망생이 만든 잡지라는 언론보도를  접했는데, 나 역시 언론사 지망생이라 그런지 눈길이 갔다. 그래서 난생 처음으로 후원이라는 것을 했다. 후원에 대한 보답으로 잉집장이 보내준 <월잉>은 실로 재밌었다! 혼자 집에서 방에 틀어박혀 낄낄대고 깔깔대며, 덕분에 짧으나마 무기력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결론은 <월간잉여>?
여름방학에는 한 언론사 대학생 인턴기자 최종 면접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고 대신 토익을 공부해봤다. 그런데 이 역시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다. 남들이 다 하니까 어쩔 수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학원 몇 번 나가고, 시민기자 활동을 잠깐 하고나니 방학이 홀라당 지나가고 말았다. 다시 돌아온 후반기에는 다시 학업과 과제에 치이며 하루하루를 연명해갔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보니, 뭐 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다만, 겨울방학동안 했던 토익공부, 꾸준히 써댔던 영화 리뷰, 그리고 월간잉여 크리스마스 모임이 떠오른다.

그리고 새 해를 맞았다. 스물일곱이 되었다. 복학한지 1년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학과공부에 대한 동기부여는 되지 않는다. 그냥 중간만 가면 다행이라는 생각은 여전히 내 머릿속을 지배하고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빨리 졸업이나 하고 싶다는 것뿐이다. 얼마 전 한 언론사 공채가 있었다. 나는 아직 재학생이라 지원할 수는 없었지만, 1차 합격자 명단만 봐도 어찌나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던지. ‘나는 뭐하고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쉬움과 조급함이 나를 괴롭혔다. 그러다 최근 모처럼 힐링다운 힐링을 받았다.  월간잉여 사생대회 덕분이다. ‘월잉 가족’들과 함께, 나를 반겨주는 사람과 함께 만나서 함께 먹고 마시고 이야기하니 지화자 좋았다. 개드립과 디스가 난무하는 공간이지만, 거기서 오히려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끼는 역설. 월잉은 사람과 글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 항상 의지가 된다.




제 2회 사생대회에서의 김진수 씨. 과연 행복해보인다.




새로운 힘을 얻고 다시 무언가 해봐야겠다는 그런 ‘작심삼일’스러운 기분을 얻었기에 지금 다시 힘을 내보려 한다. 다만, 솔직히 앞으로도 학과공부는 재미가 없을 것 같다. 그래서 그건 패스…하면 안 되겠지? 졸업은 해야 한다. 현재 내가 있는 곳은 사후세계다.






김진수 씨는 스포츠 기자를 준비하고 있다. ⓒ 김진수






(격)월간잉여 13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