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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화해와 불화하기 feat. 마지막 4중주 (정문정)

야론 질버먼 감독의 마지막 4중주(A Late Quartet)를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좋았다.
영화에는 무려 섹시 할배 크리스토퍼 월켄과  미친놈 전문배우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이 나온다. 내용은 25년간 함께 해온 세계적인 현악 4중주단 ‘푸가’ 의 정신적 지주, 피터가 파킨슨병에 걸리면서 네 명의 단원들이 겪게 되는 혼란에 대한 이야기다. 음악에 대한 영화치고 뭐 별 특이할 것 없는 이야기잖아, 싶을 수도 있겠다. 










언뜻 이상적으로 보일지라도
이 영화는 기발한 스토리로 승부하는 영화가 아니다. 피터는 첼로, 대니얼은 제 1바이올린, 로버트는 제 2바이올린이고 줄리엣은 비올리스트인데, 이들의 관계가 좀 복잡하다. 피터와 줄리엣은 오랜 스승과 제자 사이고, 로버트와 줄리엣은 딸을 두고 있는 부부사이다. 에… 또… 줄리엣과 대니얼은 예전에 연인 사이였다(거참 질척질척하구만). 초반에 영화는 푸가를 오랜 시간 합을 맞춰온 평화롭고 이상적인 악단으로 묘사한다. 서로를 존경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중산층의 스위트 홈이 떠오르는 곳이다. 하지만 오래되고 끈끈한 관계이면서 겉보기에 불화가 없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참고 있거나, 철저한 위계가 있거나, 둘 중 하나겠죠.


문제들은 피터가 파킨슨병 때문에 악단의 미래가 흔들리면서부터 튀어나온다. 항상 제 2바이올린만 담당하던 로버트는 새로운 단원이 들어오면 어차피 소리가 완전히 바뀌니 이를 계기로 자신도 제 1의 바이올린을 해보고 싶다고 말한다. 여기서 개코와 이센스처럼 쌍방디스가 시작된다. 제 1바이올린을 맡고 있는 바이올리니스트 대니얼은 “자넨 훌륭한 연주자야. 하지만 제 1바이올린 감은 아니야”라고 말한다. 로버트는 “니가 나보다 잘난 줄 알지?”하고 응수한다. 여기서 로버트가 빡쳐있는데 그의 부인이자 음악적 동지인 줄리엣이 그를 달랜다. “당신만 중요한 게 아냐. 우린 전체를 생각해야 해.” 로버트는 홧김에 “당신 연주는 최고에요”라고 말하던 조깅 동료와 섹스를 하고 돌아오다가 이걸 또 부인한테 들켜서 이혼 위기에 이른다.

한동안 이 영화에 대해서 생각했다. 관련해서 글을 써야겠다고 맘먹은 건 이 영화를 보고 난 후 정보를 검색하다가 “화해에 대한 영화” 라는 식의 평을 본 후다. 엥? 나는 이 영화를 인생에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불화에 대처하는 방식이라고 봤는데요? 나는 이런 평을 쓴 사람이 불화는 나쁜 것이며 화해를 위한 도구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인생에서 진짜 화해가 있는가? 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나는 오래 생각하게 되었다. 이어지는 글은 그 고민에 대한 내 나름의 답이다.

우리는 관계에서 가끔 로버트가 되기도 하고 대니얼이 되기도 한다. 두 명 이상이 모이면 사람들은 특정한 역할을 요구받는다. 역할이 익숙해지면 그게 처음부터 자기 것은 아니었다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자연스러워지게도 된다. 나는 3남매 중의 둘째인데, 언니에 대해서 우리 가족은 종종 우리끼리든 남에게든 이런 식으로 말하곤 했다. “어찌나 욕심이 없는지 뭘 사달라는 말도 안하고 뭘 하겠다고 말 한 적도 한 번도 없어요.” 언니는 휴대폰을 사달라는 말도, 옷을 사달라는 말도 한 적이 없다. 대학에 보내달라고 한 적도 없어서 언니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공장으로 갔다.


언니보다 한 살 어린 나는 반대였다. “이기적인 년”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원하는 게 있으면 가출을 하거나 자해하면서까지 얻어냈다. 대학에 보내달라고도 당당하게 요구했다. 어릴 때는 언니가 그 모든 걸 원했기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 생각해보니 언니는 가난한 집에서 희생하는 맏딸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거였다. 말하자면 나는 제 1바이올린이었고, 언니는 제 2바이올린이었다. 언니는 “내가 오랫동안 제 2바이올린을 했으니 이제 나도 제 1바이올린 좀 해보자” 라고 말하지 않았고, 나는 이게 당연한 건 줄 알아서 “그동안 열심히 해줘서 고마웠어. 이제 우리 바꿔볼까?”라고 말하지 않았다. 언니가 말을 했더라도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라고 했을지 모른다.


호구들이 호구짓을 그만두겠다고 하면 희생할 줄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이 된다. 그런데 호구들이 처음부터 원해서 호구가 된 것은 아니다. 어쩌다보니 선의로 호구짓을 몇 번 하게 됐고, 그러다보니 사람들이 “착하다”고 칭찬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호구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호구가 희생하게 되면서 그 조직은 겉으로 이상적으로 조화로운 모습이 된다. 가끔 호구가 이건 아니지 않나, 하는 표현을 할라치면 사람들은 “갑자기 왜 이래?” “니가 다 망치고 있어”라는 반응을 보인다. 원래대로 (호구는 계속 호구짓을 하는 걸로) 역할이 분담되어야지만 사람들은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며 안도한다. 




완전한 화해는 없다
완두콩은 껍질을 까면 주르륵 떨어지지만 청국장은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는다. 관계도 오래될수록 발효되어서 시간이 지날수록 한 번에 끊어내기가 어렵다. 오랜 친구끼리나 가족 사이의 감정은 말하기엔 애매하고 덮기엔 찝찝한 것들이 결합돼서 나중에는 한 덩어리로 썩어버린다. 의사가 암덩어리을 빼려 배를 열었다가 너무 전이가 커서 다시 덮어버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수습하기 어렵다.

영화는 네 명이 25년간 쌓아왔던 감정을 폭발시키며 막장으로 치닫는 관계들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이들이 함께 연주하는 공연장을 비춘다. 연주하게 되는 음악은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이다. 이 음악은 총 7악장인데, 각 악장이 연결돼 있어 연주자들은 쉴 수 없다. 이렇게 오래 쉬지 못하고 연주하다 보면 각 악기들의 음률이 어긋나게 된다. 하지만 연주는 계속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연주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필연적 불협 앞에서 최소한의 불협을 위한 고도의 연주를 하는 것이다. 영화 초반 피터는 베토벤 현악 4중주 14번의 예정된 불협화음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묻는다. “어떻게 해야 할까? 연주를 멈춰야 할까? 아니면 불협화음이 생겨도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맞춰가야만 할까?”

나는 그동안 연주를 멈추는 편이었다. “에이 씨발 못해먹겠다”하고 공연장을 떠났다. 에이부터 제트까지 차근차근 설명하느니 말하지 않는다는 주의이고 그렇게까지 관계를 지속해야 하나? 라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8년 된 친구와의 불화가 있었다. 모두 내 잘못에서 시작됐지만 친구가 나를 비난하는 말에는 사실이 아닌 부분도 있었다. 친구의 메일을 받고 오랫동안 나는 답하지 않았다. 오해는 메워질 수 없으니 그냥 놔두고 싶었다. 그때 이 영화를 본 것이다. 내가 그동안 불화를 만났을 때 덮어두거나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대응해온 건 불화 후 ‘완전한 화해’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데 생각이 미쳤다.  그렇게 안 될게 뻔하니 애초에 그만뒀다. 썩은 것을 인정하고 그걸 좀 덜어내고 금을 씌우든 아말감을 씌우든 하면 되는데 썩은 걸 인정하지 않거나 당장 해결하기가 무서워 치과에 가지 않다가 결국 뿌리째 뽑아낸 것이다.


나는 이번에는 한번 치료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오랫동안 곱씹고 곱씹다가 친구에게 답을 보냈다. 친구는 이해한다고 말했지만 우리는 예전처럼은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관계는 계속할 수 있다.

다시 영화이야기로 돌아와서, 우리는 푸가가 그랬듯이, 연주 중 쉴 수 없다. 틀렸다고 해서 “죄송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시죠”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튜닝할 시간이 없어서 불협이 예정되어있을 지라도 연주는 계속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최적의 조율이 아니라 최선의 적응에 있다고 나는 보았다. 음의 이탈과 불화 앞에서도 연주를 끝내겠다는 마음으로 달라진 나의 소리와 어긋나는 다른 사람의 소리를 맞춰서 어떻게든 나은 음악을 만들어 보려는 그 자체. 망가진 걸 인정하지 않고 원래대로 연주하다가는 더 큰 오류가 생기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푸가의 단원들이 악보를 덮는 것은 이에 대한 훌륭한 은유다.

우리는 완전히 화해하지 않고도 공존할 수 있다. 아니, 완전한 화해는 없다. 화해라는 이상과 불화하지 않으면 우리는 평생 호구짓을 하거나 호구짓을 요구하는 꼰대가 되고야 만다. 필요한 것은 화해하지 않고도 ‘공존’하는 법 - 불화 그 자체에 대처하는 방식이다. 불화와 변화는 숙명이며,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안에서 제각기 나름의 방식을 찾기 위한 투쟁을 지속한다는 것. 그러니까 잉집장 너, 나랑 좀 싸우자.





















(격)월간잉여 1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