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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가장 잉여로운 콘텐츠, 프로야구 (무냉)

잉여들의 잉여로운 눈과 잉여로운 귀를 끌어들일 수 있는 잉여스러운 콘텐츠의 조건은 생각보다 까다롭다. 잉여들의 이목과 취향을 위한 콘텐츠라면 응당 장시간 지속 되어야 하고, 중간중간 쉬는 시간도 있어야 하고, 잉여들을 대상으로 하기에 어마무지스러운 집중력은 아니 요구되어야 하고, 간간이 집중의 텐션을 곧추세워야 하는 시간들도 배치되어 있어야 함은 물론이고, 남는 (그러니까, '잉여')시간에 궁금한 것들에 대한 잉여로운 연구를 유도하는 아리까리함도 갖춰야 하고, 무엇보다 큰돈이 들어가지 않아야 한다(시간의 기회비용을 제외한 후 도출되는 값이 공짜에 가까울수록 좋다).

 

자신을 '잉여'라 표방하는 이들을 위한 완벽한 일일연속극이 여기에 있다. 이 일일연속극은 1982년 봄의 어느 날부터 오늘, 그리고 이어질 날들마다 매 봄부터 가을까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월요일을 제외한 모든 날에 매일 방영됐고, 방영될 것이다. 이 일일연속극은 수많은 주인공들과 조연들, 악역들, 연출자들을 배출했다. 이 일일연속극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 흔히 쓰이는 대머리 독재자의 우민화 정책의 일환, 타임아웃이 없는 스포츠, 끊김의 미학, 땡볕 아래 펼쳐지는 열혈 사나이들의 이야기등의 표현들은 잠시 제쳐두기로 한다. , 그러니까 이 글은 프로야구라는 이름의, 어쩌다보니 잉여들의 취향에 최적화 되어버린 한 일일연속극에 대한 이야기다.

 







이 연속극을 즐길 수 있는 방법과 주목해야 할 캐릭터는 다양하다. 이 연속극의 자신만의 주인공을 선택할 때, 그 주인공이 ''이든지, '선수'든지, '감독'이든지, 혹은 자신의 '잉생'을 대입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이다(대다수의 잉간들은 그 초점을 ''에 두고 즐기곤 한다). 그리고 그 대상들은 저마다의 서사를 가지고 있다.

 

핑계 없는 잉여 없듯 프로야구에, 아니 이 연속극의 모든 것 중 사연 없는 것은 없다. 초여름까지만 해도 승승장구 하다가 마치 자연의 법칙인 것처럼 한여름 뒤 순위가 곤두박질치는 것이 전통이 되어버린 팀, 야구실력과는 별개로 언제나 존재감이 미비해 보이거나 착해보이기까지 했지만 무면허 음주운전이나 폭행 따위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선수, 모든 능력이 완벽에 가깝지만 갑의 비유를 맞춰주는 능력만은 가지고 있지 않아 매번 해고당하기를 거듭하는 감독까지. 당신이 주인공으로 삼을 이는 누구인가?

 

개그캐를 좋아한다고? 잘 찾아왔다. 이 판은 희화화하기 좋은 녀석들이 즐비하다. ‘마성의 강게이가 대표적인 예다.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미남 심수창은 18연속 패전투수라는 사상 최악의 기록도 갖고 있다. 이밖에 다양한 개그캐가 있지만 넘 많아서 열거 자체를 못하겠음. ㅠㅠ







좌: 심수창, 우: 강정호





 

잉여를 위한 최적 유형, ‘

스포츠든 게임이든 본잉은 크게 그 유형을 두 가지로 구분한다.


1. 실시간으로 이루어지는가?

(리얼타임이라고 한다. 축구, 농구, 스타크래프트, 라면 끓이기, 수강신청 등)

2. 아니면 내 차례의 무언가가 끝나면 상대편의 대응을 기다리는가? (턴 제라고 한다. 바둑, 장기, 묵찌빠, 프린세스 메이커, 팅팅탱탱 후라이팬 놀이, "자니?" )

 

직접 행하는 입장에서는 1의 경우나 2의 경우나 정신없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관전하는 입장에서는 2, 즉 턴 제의 경우가 행위의 사이 시간을 뭔가 잉여로운 짓으로 채우기 좋을 것이다. 그 경우의 수는 무한에 수렴하는데,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엄마에게 잔소리를 듣는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트위터에다가 감성팔이를 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그 투수의 올 시즌 기록을 검색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왜 야구장에 같이 갈 남자친구가 없는지에 대하여 통렬히 반성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배고파 한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치킨을 시킨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이 타이밍에 왜 저런 공을 던졌을까에 대해 분석해본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야갤(디시인사이드 국내야구갤러리)에 접속했다가 눈을 배린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잠든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구여친에게 "자니?"라고 물어본다

투수가 공을 던진다 포수가 그 공을 받는다 다시 투수가 공을 던지기 까지의 시간 동안 공 하나에 추억과, 공 하나에 사랑과, 공 하나에 쓸쓸함과, 공 하나에 동경과어머니.

 










야구에서 공수교대가 이루어지는 시간은 더욱 기니 더 많은 짓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사실 야구를 보면 볼수록 사이 빈 시간들이 승패를 좌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님.)

즐겁고 건전한 스포츠 관람을 하면서도 수시로 남는 시간에 엄청나게 많은 짓(그러나 전혀 도움이 되지는 않는)을 할 수 있으니 어찌 야구를 잉여들을 위해 개량된 종목이라 하지 않을쏘냐.

게다가 이 짓을 월요일을 제외하고 비가 오지 않는 모든 날마다 반복할 수 있다고!


그러므로 단언컨대, 야구는 가장 잉여로운 콘텐츠다.












(격)월간잉여 14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