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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잉여'라는 언어의 2년, 그리고 미래(조은상)

버트란드 러셀에 따르면 인간의 언어는 표시의미를 갖고 있다고 합니다. ‘의미는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고, ‘표시는 대상을 제외한 언어 자체를 뜻합니다. 쉽게 말해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저와 같은 사람들이 잉여의 의미라면, ‘잉여라는 말 자체는 표시인 셈입니다. 그리고 따옴표란 어떤 언어에서 의미를 제거하고 표시만 남기는 기능을 한다고 러셀은 말합니다. 어디선가로부터 언어 자체=표시만을 따옴을 뜻하는 것입니다. 따옴표가 있는 잉여와 따옴표가 없는 잉여는 다르다는 말입니다. 때문에 이 글에서 자주 사용될 단어 잉여는 아마 거의 전부 작은 따옴표 안에 끼어있을 듯합니다. 아래에서 제가 주로 이야기하려는 것이 잉여의 의미가 아닌 표시, 잉여라는 말 자체거든요.

 




버트란트 러셀




고전적 잉여와 현대적 잉여


지난 몇 년 사이에 잉여를 주제어로 하는 컨텐츠가 많이 나오면서, 그 말이 지나치게 일반화되고 힘이 빠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실제로 도서검색을 해보면 잉여라는 키워드를 포함하는 출판물은, 일부 문학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2011년 이후에나 나왔죠. 이렇게 보니 이 글이 붙어있는 <()월간 잉여>가 창간된 시기와도 대략 겹치는군요. 아무튼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잉여라는 말, 언어입니다. 물론 이 말 자체는 오래 전부터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걸 일일이 조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여기서는 널리 알려진 계기들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방금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잉여또는 잉여인간이란 말로 어떤 사람들이 지칭되기 시작한 것은 오래된 문학작품들로부터라고 하는데요. 아시다시피 가장 유명한 예로는 손창섭의 <잉여인간>이나 19세기 러시아 문학작품들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말하자면, 본래 잉여는 주로 문학계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나 유통되던 그리 만만치 않은 개념이었습니다. ‘사회에 아무런 쓸모도 없이 남아도는 인간이라는 의미처럼, ‘잉여인 인간들을 강하게 비판하고 비하하는 표현이었지요.

 

그런데 이 고색창연한 단어는 200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생명력(?)을 얻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영화<말죽거리잔혹사>의 한 장면이 플짤로 확산되면서 본격적으로 보급되었다고 합니다만 그게 사실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대충 그 시기를 기점으로 잉여라는 말의 성격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즉 문학작품에서 지식인들 중심으로 보다 진지하고 심각한 어투로 쓰이던 잉여, 21세기 들어서 인터넷을 중심으로 가볍고 자기비하적으로 쓰이는 잉여, 중심의미는 겹치지만 서로 다른 맥락 위에서 쓰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는 편의상 전자를 고전적 잉여’, 후자를 현대적 잉여라고 제 맘대로 이름 붙이고 구분해서 한번 생각해보려 합니다. (사실 처음에는 헌 잉여새 잉여정도로 이름 지으려다 좀 있어 보이려고 고쳤.)

 

물론, 문학강독을 듣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요즘 우리가 잉여라는 말을 쓸 때는 현대적 잉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글을 쓰는 저도, (아마도)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도 모두 현대적 잉여지요. 그렇다면, 고전적 잉여와 현대적 잉여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아니 애당초, 장롱 속에 묻혀있던 낡고 딱딱하며 학술적인 냄새까지 나는 한자어가 재등장한 이유는 뭘까요? 나아가 잉여라는 말의 미래에 대해 분석...인 척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잉여라는 말의 미래는 <()월간 잉여>의 미래, 궁극적으로는 잉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미래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어쩌면.

 


잉여의 재림


글이 안 써지는 탓에 인터넷을 기웃거리다 본, <()월간 잉여>의 자매 사이트인 여잉추 잉명게시판의 게시물의 한 구절을 빌려오겠습니다(원작자 표시를 하고 싶어도 익명이라 어쩔 수 없네요. 1214일 밤10시쯤 글쓰신 분 ).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이들을 살펴보면, 그들 대부분 잉여였습니다.

고대 시절에는 "시민"이라는 이름을 가진 잉여들,

중세 시절에는 "귀족" 혹은 "양반"이라는 이름을 가진 잉여들,

유명한 예술가들도 알고보면 다 잉여였고,

유명한 과학자들도 알고보면 다 잉여였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고전적 잉여는 윗글에 비춰서 생각해 볼 수 있을 듯 합니다. 귀족 등 지배계급 또는 그들의 후원을 받아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않아도 되는 잉여들이죠. 이들은 자주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잉여란 말 자체가 그런 사람들을 욕하기 위해 나온 것이지만, 이런 삶은 동시에 일종의 특혜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잉여로움을 통해 예술이든, 과학이든 창조적인 것이 나오기도 했고요. 즉 비판적으로 보든 호의적으로 보든, ‘고전적 잉여가 평범하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임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반면 이 점에서 현대적 잉여는 정반대입니다. 소수이기는커녕, 아주 넘쳐나죠. 아니 특정 세대 일반을 두고 잉여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입니다. 잉여사회니, 잉여세대니 하는 말이 가능한 이유인 것이지요. 이는 물론 작금의 세대론과 결합되어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만, 기본적으로 현대적 잉여고전적 잉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의 사람들에 해당하며 훨씬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정리해 보자면, ‘고전적 잉여현대적 잉여는 개념의 내포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공통점을 공유하지만 외연의 측면에서 크게 엇갈려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잉여의 사이의 이러한 차이는, 이 말이 (그것도 상당히 다른 맥락에서) 다시 호출된 이유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잉여는 예전에 있었다가 사라졌던 것이 다시 나타났기 때문에 다시 그것을 가리키기 위해서 부활한 것이 아니라, 기존에 없던 것을 새롭게 부르는 이름으로 쓰기 위해 재활용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기존에 없던것이라고 한 것은 다소 어폐가 있겠네요. 정확히는 없던 것으로 치부되던것이라고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말하자면 지금의 현대적 잉여가 가리키는 사람들은 예전 기준으로, 사회라는 고리의 바깥에 있던 것으로 즉 없던것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느 시기에나 어느 지역에서나, (거부당하든지 또는 스스로 거부하든지) 사회적, 공동체적 활동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사람들은 있어 왔습니다. 다만 극소수였고 존재 자체를 무시해도 별 문제가 없었지요. 하지만 지금 잉여라 불리는 사람들은 어떠한가요? 어떤 세대를 통째로 지칭하는 이름으로 써도 무방할 정도로 매우 보편적이면서 일반적인 삶의 양태가 되어버린 이상, 없는 셈으로 칠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잉여라는 부정적인 말은 아주 편리하게 채용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부정적이라는 말은 이중적인데요. ‘좋지 못한’ ‘바람직하지 못한것으로 여겨지기에(가치적인 면에서도) 부정적이며, 스스로 내용물을 갖지 못하고 무엇무엇이 아닌 남는 것이라는 식으로만 쓰인다는 점에서도(형식적인 면에서도) 부정적입니다. 형식적으로 부정적이기 때문에 원래의 정확한 의미를 고려해야 할 필요도 없으며, 가치적으로 부정적인 말이기 때문에 그런 이름을 가져다 쓴다고 해서 뭐라고 할 사람도 없습니다(자기가 자기 욕을 한다는 셈이니까요). 이렇게 본다면, 매우 많은 수가 갑작스레 쏟아져 나타났지만 스스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애매했던 사람들이 잉여라는 옛 이름을 새로운 용법으로 재빠르게 취한 것은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닐까요?


 





잉여로 도서검색했더니 대충 이렇다. 대다수가 1-2년 사이에 나온 것들.

 







잉여의 위기? ‘잉여의 위기!


이쯤 해서 그럼 잉여라는 이름을 새롭게 취한 사람들이 왜 등장했는가, 라는 아주 큰 질문이 투척될지도 모르겠는데요. 그 얘기하려면 신자유주의가 어쩌니, 후기자본주의가 어쩌니, 포스트모던이 어떠니 등등 길게 나열되어야 할 듯하니 여기서는 무리. 이럴 줄 알고 처음에 밑밥을 깔았잖아요. 여기서는 따옴표 쳐진 언어로서의 잉여만 이야기한다고


 

이렇게 보니 잉여라는 말이 인터넷에 돌기 시작한 것도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듯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산되고 일반화되는 과정을 겪어 왔습니다. 그 결과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우리의 키워드, ‘잉여라는 말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잉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언론에서도 다뤄지고 논문이나 책도 나오고 심지어 영화 제목으로도 쓰이는데 정작 그 말의 힘은 약화되고 있다니 말이죠.

 

잉여가 자격증이 발급되고 4대 보험에 가입되는 그런 게 아닌 이상, 잉여가 열려있는 개념인 이상 이런 운명은 어느 정도 예견되었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잉여에 대한 논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점점 많은 것에 잉여라는 이름이 붙게 되니까요. “모든 것이 마피아라면 아무것도 마피아가 아니다라고 한 어느 이탈리아 학자의 말처럼, 언젠가 누구도 잉여라는 말을 쓰지 않게 될지도 모르지요. 요컨대 이 위기는 잉여의 위기, 말의 위기인 셈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다시 따옴표로 돌아옵니다. 왜냐하면 이 위기는, ‘잉여라는 말이 널리 쓰이게 된 배경이 되었던 사람들, 잉여 자체에 큰 변화가 일어나서 생긴 게 아니라 순전히 따옴표 속의 잉여즉 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고요?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단순합니다. 그냥 되는대로 나둡시다. 물론 비록 저를 포함한 독자분들이 이렇게 <()월간 잉여>를 통해 교류할 수 있는 것은 잉여라는 키워드가 대두되었던 덕분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잉여라는 말이 없었더라도, ‘잉여란 말이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잉여인 것은 변함없지 않나요? ‘잉여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이름은 붙어있었을 것이고, ‘잉여가 없어지더라도 눈치껏 새 이름을 쓰면 됩니다.

 

결론적으로, 2주년을 맞은 <()월간 잉여>가 격변하는 시류에 편승할 수 있도록 언제든지 이름을 갈아탈 마음의 준비해야 하는 게 아닐지 제안해 봅니다. 정절과 지조는 노노. 예컨대 빨갱이버리고 종북으로 훌륭하게 리모델링에 성공하신 언어의 카사노바 같은 분들도 계시는데, 본받으면 좋을 것 같네요. 또 그런 의미에서 중요한 건, 잉집장님과 그 이하 잉여 제위들은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누구보다 빠르게 캐치할 수 있도록, 지금의 잉여짓이라고 불리는 행위들을 결코 게을리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Keep goING.











(격)월간잉여 15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