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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소리

어떤 우연적인 상상력 (양인모)


(격)월간잉여 2주년에 부쳐


가까운 미래, 생명공학 따위가 발달해 유전자 조작이 이뤄지고 부모가 아이의 피부나 지능, 신체를 확률적으로 쇼핑하는 시대엔 윤리와 자유가 점차 사라질 것이다. 우연적 탄생이 아닌 확률적으로 조작된 탄생. 그 조작된, 상속자들 아니 남다른 유전자를 타고난 아이들의 미래는 이미 선택돼 있고, 사람을 만나 공동체를 꾸리거나 연애를 하는 일도 쇼핑하듯 하는 권위적인 소비자의 모습일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공상이 지금 여기서 보인다. 사람에 대한 상상력이 사라진, 우리는 이미 <가타카>의 시민인건가.

 




가타카 (1997)



창간 2주년을 맞는 월간잉여는 어디로 향하는가. 함박눈이 내리던 날, 서울 뒷골목 한 카페에 모인 독자위원들은 상기돼 있었다. 디스 섞인 잘 지내나요, 3분마다 묻고 존댓말로 서로를 유린하는 건 여전. 그렇게 2년이 지났고, 늘 다음 발행이 불투명한 자신의 미래아니 잡지에 대한 애정을 풀어놓았다. 흑염소 님이 주먹만한 귤을 탁자 위에 꺼내놓을 즈음 질문이 주어졌다. 월간잉여는 타자, 연대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런 윤리적인 상상력을 가질 수 있을까.

 

2년 동안 여러 기고자들과 독자들이 말한 잉여라는 단어엔 사회 맥락이 포함돼 있다. 잉여 혹은 잉여적 무엇은 이미 개인적 체험이 아닌 것이다. 잉여라는 말에 구조가 있고, 배제가 있으며 여기선 다행히 위트가 있었다. 자기고백. 누군가는 그것을 잉밍아웃이라 불렀고, <좋은생각>의 우울버전이라 폄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글 중 특히 정규직이 쉬는 사이에(7)’사과맛 동거 이야기(8)’ 등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글이었다.

 

사회적 맥락과 구조주의적 자기 고백은 이미 타자와 연대를 지향하는지 모른다. 때문에 타자, 연대의 이야기가 어떻게 가능하냐는 질문은 벌써 풀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계삼 님의 글(13)은 특별하다. 잉여의 지속적인 집단적 유예, 이에 대한 논리와 주장이 만들어지면 대항적 흐름으로 커 나갈 가능성이 있다, 란 누군가의 말 역시 설득력 있다. 안녕들 하십니까. 이 안부도 언제든 유효하다. 비록 디스가 포함됐지만 독자위원들의 잘 지내나요, 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는 여전히 당신이 궁금하다.

 

이웃에 대한 상상력. 우연적 탄생에서 가져야 할 감성, 윤리는 저것이 아닌가. 그 감성을 키우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보일 것이고 함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다 보면 깜빡 거리는 형광등을 보며 밀양을 생각하고, 판결문에 쓰인 46억이란 숫자를 보고 0의 개수를 가늠해볼 것이고, 용산역을 지날 땐 스스로 이카로스가 될 용기를 가질 것이다. 생명의 탄생을 우리가 통제할 수 없었다는 시작의 우연성, 그렇게 시작한 삶에 윤리적인 형태를 부여할 수 있는 자유(feat 하버마스). 그것은 언제나 있다. 가타카의 권위주의적인 소비자가 되거나, 연애를 하거나. 잘 지내나요. 우리는 함께 날개를 만들 수 있고, 추락할 수 있다.

 

2년 전 월간잉여를 만난 건 그런 추락인가. 창간호를 보고 곧바로 감상문 비슷한 글을 썼고 그즈음 니트 거꾸로 입고 나온 잉집장을 처음 만났다. 다시 겨울, 고맙게도 그때 글을 쓰면서 가진 이 공간에 대한 생각은 아직 여전하다. 비록 위원장 같은 귀찮은 거 할 사람이 너님밖에 없음. 너가 가셈 하와이, 라고 말하는 잉집장의 미소가 음흉해 보이기는 하나, 당분간은 그 미소를 더 볼 것 같다. 2년 동안 월간잉여가 만든 새로운 관계의 길, 그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2년 전 처음 쓴, 지금도 변함없는 상상을 다시 쓴다. 월간잉여는 휴머니즘이다.


 

양인모(독자위원회 위원장)




(격)월간잉여 15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