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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만 만들지 않으면 PD도 할만하다(박준수)

제목부터 뭔 개소리야? ‘강의만 하지 않으면 교수도 할만하다와 맞먹는 개소리다. 그러나 이 잡지의 몇 슬픈 글들을 보다 보니 이 것은 배부른 소리다. 배부른 개소리가 정답! 그렇다. 사실 현재 나는 잉여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과거의 만만치 않은 잉여경험을 바탕으로 잉여분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은 개뿔! 잉여들(물론 소수의)을 주 시청자 층으로 하는 예능 PD로서의 의무감이랄 까도 개뿔! 정말 희한하게도 그 누구의 강요 또는 요구 없이 자발적으로 한 문단 이상을 쓰는 것은 10여 년 전 싸이 월드에 내 인생의 삽질들을 30회까지 연재한 이후로 처음이다. 모르겠다. 단지 <월간잉여>라는 제목이 나를 설레게 했을 뿐. 월간이라는 단어가 주는 여유로움과 잉어로 착각할 수 있는 대어 같은 느낌의 단어 잉여가 환상의 궁합으로 만나 나의 배설 욕구를 자극시켰다. 이 곳이라면 내가 뭐라도 써야 할 것 같다. 젠장!

 

그래서

난 여전히 잉여의 성향을 가진 (앞 문단을 쓴 후 벌써 한달이 지났다) 케이블의 예능 PD. PD란 직업에 그럭저럭 만족하는 것도 프로그램과 프로그램 사이에 충분한 잉여 짓을 할 수 있어서다. 그리고 잉여의 잉여에 의한 잉여를 위한 내용을 프로그램을 통해 간간이 집어 넣을 수도 있다. 물론 다수보다 소수의 사람들이 이 코드를 좋아한다. 취향의 차이라고 애써 위안을 삼지만 예능 PD로서는 치명적인 약점이다. 예전에 인터뷰에서 대중이 보지 않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예능 PD는 존재 가치가 없는 쓰레기처럼 묘사했지만 난 그 쓰레기에 가깝다. ‘잉여의 성향을 띈 사람들은 이미 사회 곳곳에 침투해 있다는 심지어는 아주 안 어울리는 곳 까지도사실을 말하고 싶다. 각계, 각층에 침투한 잉여들은 조용히 자신의 존재감을 거의 아무도 모르게 드러낸다.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가 주요하다. 그게 상당히 멋지다고 생각한다. !

 

여기서

애초에 무슨 말을 쓰려고 했는 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원래부터 목적은 없었으니 모두들 이해해 주리라 믿는다. ‘목적이란 단어가 참 사람을 억압하고 긴장하게 만드는 것 같다. 한마디로 별로다. 최근에 SWAG에 대해서 알아봤는데-하도 GD가 외쳐대길래- 부와 명예 등 어떤 성공을 위해 사는 삶, 즉 목적이 있는 삶은 분명 SWAG하지 않다. 그 역이 항상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생산성 없는 일, 타인이 봤을 때 무의미한 일이라도 몰두하는 것 자체가 가치 있다는 이야기다. 잉여도 SWAG하다. 왜냐면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도 그 가치가 아직 증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세로 보일 수 있다. 그럼 좀 어때? 허세도 부릴 수 있을 때 부리자. !

 



<음악의 신>에서 허세를 선보인 이상민



마치

글을 끝낼 것 같이 하다가 다시 내가 보낸 문서 파일을 열어서 이렇게 글을 추가하는 이유는 잉집장의 요구에 의해서다. 글 제목이 문제였다. 맞다. 바보같이 프로그램만 만들지 않으면 PD가 좋은 이유를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뭐냐면프로그램을 기획한다는 명목 아래 놀 수 있기 때문이다. 유치한 정답이다. 그렇다고 내가 엄청 잘 노는 것도 아니다. (! 잘 노는 기준이 뭐래?) 미드를 보는 것은 모니터링이요, 인터넷 서핑은 레퍼런스 찾기요, 카페에서 작가랑 수다 떠는 것은 아이템 회의요, 술 마시는 것은 브레인스토밍이요, 핑계 댈게 오만 가지다. 핑계라고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행위들이 실제 프로그램 기획에 도움을 주기에 용납 또는 묵인 된다. 물론 이런 짓도 눈치껏 해야 한다. (그리고 조연출이라는 수련과 인고의 시간을 견뎌야 함은 당연지사!) 나의 상사들도 한 때는 PD였기에, 이런 심보를 모를 리 없다. 그리고 나처럼 6개월을 이렇게 보내는 것은 지나치다. 2~3개월이 적당하다. 그 동안 1테라 용량의 하드디스크에 향 후 3년간은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미드, 영드, 시트콤, 영화 등을 다운 받아 놓았다. 언제 볼 지 모르지만 일단 뭔가 해 놓았다는 안도감이 든다.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개인적으로 힘든 점은 앞서서 대충 밝혔지만 시청률의 압박감이다. 몇 년 전에는 담당 PD에게 직접 시청률을 문자로 보내주었다. 방송을 한 날 밤에 어김없이 꿈을 꾼다. 놀라울 정도로 낮은 시청률. 좌절하고 일어나면 문자 소리가 울리고 확인해보면 꿈에서보다 더 낮은 시청률에 까무러친다. 뭐 구더기 무서워서 장을 못 담글 수 없으니 난 PD의 본업인 프로그램을 만든다. 다행히 아직 위에서는 잉여성향에 병맛 코드 좋아하는 비주류 예능PD를 묵묵히 믿어 주신다. 고마움에 특유의 허세로 나를 다잡는다. ‘이번 프로그램은 꼭 시청률로 보여주리라!’

 

마지막 문장을 쓰고 나니씁쓸하고 부끄럽다. 거짓은 아닌데왠지 나답지 않아서. 

 

 

박준수 주성치가 되고 싶은 엠넷의 잉PD

<UV신드롬>, <문나이트90>, <음악의신>, <방송의적>, <엔터테이너스> 등을 만듦

 




(격)월간잉여 16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