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획

내게 흑역사는 없다(김송희)

내 흑역사는 언제였나. 도통 떠오르지가 않는다. 실수 따위는 없이 정직하게 바르게 일생을 꼿꼿이 살아와서는… 물론 아니다. 그냥 내가 뭐든지 빨리 잊어버려서 그렇다. 하루 밥 벌어먹고 살기 바쁘다보니 지나간 시간까지 추억하고 앉아있을 겨를이 없다. 무엇보다 지금 자라나는 대한민국의 새싹들이 국정 교과서로 ‘새마을 운동은 가난뱅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킨 훌륭한 운동이며, 그것을 이끈 박정희 대통령 만만세’를 배우게 생긴 이 와중에 일개 개인의 흑역사 따위가 무에 중요하겠는가. 그냥 대한민국 역사 자체가 흑역사가 되게 생긴 이 마당에!

 

실은 ‘흑역사’라는 주제를 받아들고 떠오른 이야기가 있었다. 지금은 한류스타이자 개런티가 억대 이상이 된 A모군의 이야기다. 나의 몇 안 되는 지인 중 하나인 ‘아는 언니’는 한류스타 A모군이 신인 때부터 그의 소속사 홍보팀으로 일했다. 언니네 회사에는 데뷔를 준비하는 많은 신인 배우들이 있었는데 대부분이 ‘무조건 데뷔부터 하자’ 싶어서 불합리한 계약서를 작성한 애들이었다. 그 중 유독 뽀얗고, 입술이 빨갛고, 삐쩍 마른 모델 같은 남자애가 있었는데, 피죽도 못 얻어먹은 얼굴을 하고는 지 팔뚝보다 두꺼운 밀대로 사무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언니는 많은 신인 애들 중에서도 유독 그 아이에게 마음이 갔는데 자주 밥을 사주고 챙겨주다 보니 그 아이 역시 ‘누나 누나’하며 언니를 따랐다. “누나 얼른 돈 벌어서 회사 차려서 저 좀 데리고 나가요”라고 그 애는 입만 열면 졸랐다.

 

이러저러하여 언니와 예쁜 꽃소년의 아름다운 러브스토리로 귀결되었으면 좋았으련만. 물론 그런 일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아...언니는 회사에서 무슨 건수만 생기면 그 신인 아이를 적극 밀었고 그 남자애는 운 좋게 대형 드라마에 작은 배역으로 캐스팅됐다. 회사의 간판 여배우가 여주인공으로 들어간 드라마에 끼워팔기로 들어간 셈인데, 언니는 그때부터 주연 배우는 나몰라라 하고 그 남자애만 적극 홍보하기 이르렀다. 그야말로 ‘업어 키운’ 셈인데, 허구 헌날 드라마도 처음인 신인 배우 보도자료만 돌리고, 촬영장에 가서도 톱스타 여배우님은 안 챙기고 신인 배우만 챙겨서 회사에서 싫은 소리도 수차례 들었다. 그 신인 남자배우는 그 드라마를 계기로 각종 예능, 다른 드라마에 캐스팅되며 조금씩 인지도를 넓혀 갔고 서브 남주로 캐스팅된 드라마에서 주연보다 부각 돼버리며 한 방에 톱스타로 올라간다.

 

이러저러하여 톱스타가 된 남자 배우가 회사를 차려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챙겨준 언니를 사장님으로 모셔가 둘은 돈 많이 벌며 행복하게 살았더랬다...물론 또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아이는 회사의 대표 배우가 되어 언니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고, 이후 언니는 다른 회사로 스카웃돼 회사를 그만두면서 자연스레 둘은 멀어진다. 언니는 여전히 ‘우리 000’라고 하면서 그 배우가 언니에게 꼭 갚아야 할 빚이 있는 건 아니라고 말한다. 이제 ‘클래스’가 달라졌으니 예전처럼 친하게 지낼 수 없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는 것이다.

 

흑역사가 주제인데 왜 이 찌라시스러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했느냐 하면, 언니와 그 배우 모두와 친분이 있던 한 이사(매니저)가 해준 말 때문이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신인 때 알고 지내던 사람과는 스타가 되면 관계를 끊는다는 것이다. 이제는 클래스가 달라졌으니 행동이나 태도를 당연히 달리해야 하는데, ‘훗, 개구리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네’라고 바라볼 게 뻔하니 불편한 게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은 후 언니는 일말의 ‘서운함’까지도 다 버렸다고 했다. 지금은 중국 행사 한번 가는데 몇 억씩 받는 높은 분인데, 밀대 들고 사무실 청소하던 시절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는 게 기분 좋을 리 없으니까.

 

우리는 가끔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는 사람과 ‘현재’만 알고 있는 사람을 한자리에서 만나곤 한다. 이런 경우는 사회에 나오면 더욱 잦은데, 같은 업계에 종사하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맥이 얽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잊고 있었던 과거를 소환하며 “이 자식 예전엔 지질했는데, 용됐네.”라며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뇌까리는 녀석이 있다면, 주먹이 부르르 떨지 않겠는가.

 

부르르

 

얼마 전 첫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와 현 직장에서 함께 일하는 선배 세 사람이 동석할 기회가 있었다. 첫 직장에 다녔던 게 지금으로부터 5년 전인데, 지금에 비하면 업무도 서툴렀고 그냥 사회초년생 ‘애기’였다. 옛날 선배와 지금 선배는 서로 친구여서 미리 약속을 잡고 두 사람을 함께 아는 나까지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 자리에서 다행히 내 주먹이 부르르 떨리는 일은 없었다. 옛날 선배는 지금보다 더 별 볼일 없었던 나의 과거를 5년이나 지난 술자리에 끌어 낼만큼 예의 없는 사람이 아니었고, 우리는 그것 말고도 할 얘기가 너무 많았다. 같은 업계 종사자들끼리 가지는 고민, 나이 들면서 변할 수밖에 없는 태도와 자세, 나보다 어린 사람들과 일하면서 느끼는 스트레스까지. 새삼 예전에도 좋은 사람과 일했고, 지금도 좋은 사람과 일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나’는 특별히 달라진 게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별로 성장한 것도 없었고, 여전히 비슷한 고민을 매일 하고 있고, 모아놓은 돈도 없었고 여전히 비슷한 업무를 한다. 직책이 생기지도 않았고, 여전히 다이어트에 실패하고 있다. 심지어 월급도 그때랑 비슷하다.(젠장)

 

흑역사란 현재와 미래가 과거보다 진전되었을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구질구질한 과거가 있으려면 적어도 지금이 그때보다 나아졌어야 비교 우열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과거나, 현재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그냥 현재 진행형 흑역사 인생이라고…쓰고 보니 울 것 같아. 나 왜 이렇게 글에서 자학하고 있지?

 

톱스타가 신인 시절의 흑역사를 떠올리기 싫어하는 것은 그만큼 과거와 현실의 격차가 크기 때문이며, 내가 ‘과거’와 ‘현재’를 한자리에 모아놔도 거리낌 없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라는 서글픈 결론. 하지만 거기서 아주 조금, 개미 눈물만한 긍정을 찾아낸다면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크게 부끄러울 게 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는 것이다. 누구에게 사기 친 적도 없고, 누구를 크게 아프게 한 적도 없으며, 내 일을 남에게 미루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건 지금이나 그때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때보다 조금은 어른이 되었기에, 그때는 하늘처럼 높아보기이기만 했던 선배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릴 수도 있게 되었겠지. 그러니까 여전히 나에게 흑역사는 없다!

 

 

김송희. flymoon6@naver.com

blog.naver.com/flymoon6

 

 (격)월간잉여 18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