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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진보정당이 호구당 (백철)

"오랜만에 월잉글 써보시는 거 어때여?" 오랜만에 그녀가 연락을 해왔다. 레이디가카 시대에도 별 일 없이 살 수 있지 않겠느냐는 그런 희망 섞인 글을 썼는데, 세월 참. 서로 글을 부탁하는 사이여서인지 단번에 가타부타 답을 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명확히 '거절' 하지 못했다. 그것이 잘못이었다  내가 월잉의 호구다!

 



만만한 게 운동권

만만한 사람들이 호구가 되는 것 같고, 한국사회에서는 운동권을 만만하게 여기는 것 같다.

 

애처로운 운동권들. 1980~90년대와 달리 2010년대 운동권들은 갈 데가 없다. 운동하느라 스펙관리를 못하니 취직을 못한다. 운동권으로 찍혀 기업에서도 꺼린다. 기껏해야 갈 곳은 시민단체나 정당인데 이곳에 취직한 운동권들은 88만원 가량의 월급을 받고 그 상당수는 당비, 기부금, 시민단체 회비 등으로 뜯긴다. 운 좋은 몇 명은 정치권으로 진입한다. 하지만 2030세대 운동권들은 486세대처럼 운동 경력을 인정받아 주류 정치권으로 직행할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된 지 오래됐다. (월잉에서 인터뷰했던 김재연 의원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운동권에서 가장 밑바닥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는 건 정의당과 노동당이다. 진보정의당, 진보신당에서 각각 이름을 바꾼 두 당은 이 땅의 진정한 호구정당이다. 겨우 먹고 산다는 의미의 호구(餬口)도 맞고, 위태로운 상황에 놓였다는 뜻의 호구도 말이 된다.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의 호구도 가능하다. 선거에서 야권연대로 이용당하고, 당내 정파는 주류에게 이용당하고, 당원들은 당 지도부에 이용을 당하며 살아온 게 운동권 정당들의 역사다.

 







정의당과 노동당이 자처한 부분도 있다. 두 당에 속한 사람들은 서로 자기들이 잘났다고 아우성이다. 양당 홈페이지에 가면 서로를 공격하는 내용이 이따금 올라온다. 정의당이 보기에 노동당은 "고립주의를 실천하다가 의회 진출도 못하고 망한 놈들"이다. 노동당이 보기에 정의당은 "유시민 패거리랑 합쳤으면서 저것도 진보라고 ㅉㅉ"라는 평가를 받는 집단이다. 솔직히 외부에서 보기에는 둘다 5051보인 면이 있는데. 이들은 서로 말은 안하지만 속으로는 '내가 진정한 진보'라고 자임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보면 평소에 내보내는 논평의 내용이나 홈페이지에 걸어놓은 추진 정책이나 특별히 다른 게 없다. NL의 동질성을 확보한 통합진보당과 비교해도 사실 거기서 거기다.

 

원래 당명인 진보정의당이나 진보신당도 그렇다. 진보는 그렇다 쳐도 정의는 조갑제부터 이석기까지 모든 사람들이 외치는 가치다. 진보신당은 '진보적인 신당'이라는 뜻인데, 5년째 자신들이 신당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당명만 봐서는 이들이 뭘 하려는 집단인지 정확히 분간이 안간다. 대충 정책으로 봐서는 (겉으론 부정하겠지만) 유럽식 집권 사민주의 정당으로 가겠다는 것 정도만 파악이 된다.

 

이제 진보정의당은 정의당, 진보신당은 노동당이 됐다. 조금은 뜻이 분명해진 느낌이다. 강령이나 정책 하나하나 따지면 조금은 차이가 더 생긴 부분도 있고, 여전히 총론에서는 뭐가 뭔 차이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일단 이름만큼은 확실히 달라졌다.

 

정의당은 일단 '상식'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유시민 전 의원을 비롯해 '깨어있는 시민들' 집단이 많이 가입했으니 그런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다. 노회찬, 심상정 등 민주노동당-진보신당을 거쳐온 사람들과 유시민계 일부가 사민당을 적극 밀었지만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다. 민주노동당 NL 출신이었던 분들이 사민주의를 내세우는건 너무 '개량스럽다'며 반대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민주노동당 색도 대폭 제거했다. 당대표는 국민참여당 출신인 천호선이고, 사무총장 권태홍도 국민참여당 출신이다. 당 정책위의장은 참여연대 출신인 박원석 의원이 맡았다. 그래서인지 일각에서는 당이 우경화됐다는 평가도 나온다. 그런데 사실 우경화고 자시고 할 말이 별로 없다. 애초 진보정의당은 무슨 목적이 있어서 생긴 당이 아니다. '탈통합진보당'이 모인 집단일 뿐이다. 처음에 '뭘 하겠다'는게 있어야 이들의 진보성이 퇴색된 것인지 아닌지 볼 수가 있는데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평가할만한 사실관계가 없는 실정이다.

 

문제는 정의당이 생각하는 '상식'이 무엇이냐는 점이다. 각 정치세력은 각자 자신들만의 상식을 내세운다. 새누리당의 상식에서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NLL을 포기한 인간이며, 민주당은 반대만 할 줄 없는 무능력자 집단이다. 이들의 상식에서 보기에 통합진보당은 북한의 지령을 받는 집단이며, 정의당이나 노동당은 신경 쓸 가치가 별로 없는 운동권 모임이다. 민주당의 상식에서 보면 새누리당은 없어져야 할 정당이다. 통합진보당이나 나머지 '진보 떨거지들'은 새누리당 박멸이라는 역사적 사명을 앞에 두고 피아구분도 못하는 또라이들이다.

 

정의당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행보에서 정의당st 상식의 일면을 볼 순 있다. 천호선 대표의 경우 한때 민주당식 상식과 가까웠던 사람이다. 그가 대표가 됐다는 것은 정의당이 기존

 

진보정당의 원칙보다는 (좋게 말해서) 유연한 정책을 펼 가능성이 보인다는 점이다. 전보다 대중적인 진보정당을 만들어 상식이 복원된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 정의당의 꿈일 게다. 정의당의 상식이 뭔지는 모르지만 새누리당의 상식과는 크게 다를 것이다. 하지만 민주당의 상식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는 앞으로 정의당 스스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진보개혁세력은 다 뭉치자는 '빅텐트론'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있다.

 

정의당 원내대표 심상정 의원의 경우 뭐가 어찌됐든 '3세력'으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갖고 있는 것 같다. 심상정 의원은 최근 안철수 세력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행보를 몇 차례 했지만 안철수 세력으로부터 거절당한 바 있다. 최장집 교수의 정책네트워크 내일 이사장 사퇴와도 관련이 있다는 관측도 있다. 감히 소설을 써보자면, 최 교수가 '정의당과의 연대는 해볼만한 것 아니냐'고 안철수에게 제안을 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 그곳을 나온 것은 아닐까.

 

정의당이 '상식'을 선택했다면 노동당은 '계급'을 택했다. 어차피 노동자 계급이 인구의 다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는 이상, 철저히 노동자의 편에 서는 정당을 만들어 나가자는 것이 노동당의 목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속내를 살펴보면 노동당이 계급정당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노동당의 주도세력은 '전진하는 활동가연대' 출신으로 대표되는 PD계열이다. 노동당이라는 당명도 이들이 주도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PD계열은 한때 자신들이 주도했던 '민주노동당'을 되찾아오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는 것 같다. 노동당 주도세력의 의지는 당대회에서 새로 결정한 당 강령에서도 명확히 보인다. 기존 민주노동당-통합진보당의 강령과 총론에서 비슷한 정의당의 '새 강령'과 달리 노동당은 맨 처음부터 "자본주의의 쳇바퀴 속에서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는 명확한 문구를 제시한다. 민주노동당이 얼떨결에 얻은 수많은 의석과 순간적인 인기 속에서 노동자 계급의 이해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했다는 문제인식이 느껴진다.

 

문제는 현실이다. 노동당이라는 이름은 자신의 취지와는 달리 '노조활동가들의 당' 또는 '조선로동당의 아류정당'으로 오해될 소지를 다분히 갖추고 있다. 정의상으로 노동자 계급은 사장에게 월급을 받고 회사를 다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한다. 아직 취직을 하지 않은 사람들 역시 '예비 노동자 계급'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의 노동시장 참가율이 65% 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게 잡아도 전체 인구의 70%가 노동당이 타겟으로 하는 '노동자 계급'인 셈이다. 하지만 노동자 계급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이와 크게 다르다. 사전에서도 노동자의 뜻에 '육체노동을 하여 그 임금으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한정짓고 있듯, 많은 사람들은

 

블루칼라 노동자만을 '노동자 계급'으로 인식한다. 더 정확하게는 블루칼라 중에서도 노동조합에 가입해 활동하는 사람에 한정되는 표현이다. 노동당이 내세우는 여러 가치가 한국사회에서 왜곡되게 받아들여지고 있는 부분도 문제다.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그랬지만 '노동당' 당명에서 많은 사람들은 '조선로동당'을 떠올린다. 노동당 관계자들은 자신들은 북한 3대 세습에 반대한다고 100번도 넘게 알려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당 자체가 불러일으키는 착시효과는 온존하고 있다.

 

조직된 노동자 계급의 다수로부터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현재 민주노총은 어쨌든 현실의 노동자계급을 대변하는 조직이다. 그런데 올해 초 민주노총 내부 설문조사에 따르면 조합원 중 8.5%만이 노동당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통합진보당 지지자는 24.9%, 정의당 지지자는 8.8%였다. 계급정당을 추구하곤 있지만, 실제 노동자의 극히 일부분만 포괄하고 있는 상황이다.

 

여기에 더해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있는 인물을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데다가, 지난해 대선을 거치면서 불거진 당내 이견도 완전히 봉합되진 못한 상황이라는 문제가 잔존해있다.

 




글 쓰던 중 터진 이석기 내란 사건

쓰다 보니 정의당, 노동당을 호구의 대표주자로 본 필자의 시각이 조금은 틀렸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도 든다. 안타깝게도 정의당, 노동당은 호구 취급을 받기 이전에 관심이 좀 더 필요한 것 같다.

 

현실정치에서 가장 호구 취급 받는 정당은 통합진보당인 것 같다. 때만 되면 찾아오는 국가보안법 단속 시즌 때마다 통합진보당 당원들이 연루된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무죄방면된다. 유죄 판결이 난 사람의 경우에도 정황증거만으로 유죄가 된 경우도 많다. 대표적 '종북사건'으로 알려진 일심회 사건의 경우 법원에서도 '일심회라는 단체는 없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이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통합진보당은 국가보안법 위반뿐만 아니라 무려 '내란모의'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정원의 대선개입 사건에 대해서는 '신중한 보도가 필요하다'던 공중파 방송사도 신나게 호구 때리기 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만만한 사람에게 소리칠 줄 아는 사람들도 저마다 각자의 온, 오프라인 공간에서 통합진보당 비판에 앞장서고 있다. '상식'을 강조하던 많은 사람들도 이석기 때리기에 나섰다.










 


언론에 나온 '이석기 녹취록' 대로라면 내란음모로 볼만한 구석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녹취록 역시 전문이 아닌 발췌본이다. 또한 녹취 자체가 공개되지 않는 한 녹취록 내용 자체가 진실인지 여부를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설사 그의 내란음모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는 '왕따의 발끈'에도 미치지 못할 것으로 보인다. 언론에 공개된 '이석기 녹취록'에 따르면 이들은 자신들이 '혁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듯 하다. 그동안 숱한 운동권들이 꿈꿔왔지만 감히 현실에서 실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혁명을 이들은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물론 무엇을 위한 혁명이었는지는답이 없다) 그런데 언론에 나온 혁명가들의 모습이 안쓰럽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이석기, 김재연 등의 모습에서 오랜 세월 욕받이로 살아온 이들의 슬픔이 엿보였다. 특히 이석기 의원의 경우 당 최고위원회에 참석해 "국정원이야말로 무덤에 파묻힐 것"이라는 강한 말을 내뱉었지만 그 얼굴에는 무언가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석기의 목소리는 혁명가의 음성이라기보다는 왕따가 학교짱에게 대들 때 내는 소리처럼 들렸다.

 

표창원 박사가 지적했듯 이석기 등의 '혁명' 시도는 현실 가능성이 낮은 '불능범'의 소행으로 볼 수 있다. 국정원은 이석기 등이 남북 전쟁과정에서 북한을 도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하지만, 주한미군이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은 높지 않다. '이석기 녹취록'에 따르면 이석기 등은 전시상황에서 통신, 철도 등을 차단시키겠다는 논의를 했다. 하지만 같은 녹취록에는 자신들이 '혁명'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고 자인하는 부분도 있다.

 

만만한 놈이 한번 발끈하면 무섭게 보이기도 한다. 당장 언론 기사를 뒤져봐도 왕따 학생, 직장인, 군인이 자살을 하거나 동료를 살해한 예를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 짱들은 왕따를 죽이지 않는다. 적당한 수위에서 괴롭혀야 꾸준히 재미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번에도 통합진보당을 완전히 죽이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통합진보당은 운동권 내에서는 왕따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안에서는 만만한 애들을 괴롭히고 때리는 역할을 해 왔다. 근데 이젠 그나마도 끝인 것 같다. 같은 NL계열이었던 인천연합 출신들은 정의당으로 떠났고, 민주노총 내 통합진보당 지지도도 20%대로 떨어졌다. 통합진보당과의 연대를 선언했던 민주노총 위원장 후보는 꼴지로 낙선했다. 한때는 최소한 운동권 내에서는 갑이었던 통합진보당의 비참한 말로가 점점 다가오고 있다. 그렇다면 정의당과 노동당은 호구정당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게 보면 이 불쌍한 운동권들이 힘 좀 냈으면 좋겠다, 아울러 월잉 독자들도 운동권 애들에 대해 너무 욕은 하지 말아달라는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격)월간잉여 14호에 실린 글입니다. 즉, 작년 가을에 쓰인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