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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숫자로 보는 대통령(잉집장)

1975년 박정희 대통령의 초청으로 처음 방한한 오마르 봉고(향년 73)는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그 유명한 기아의 승합차 봉고차도 이 때 나왔다. 봉고 대통령에 대한 오마주로 명명됐다.) 이후 봉고는 1982년 전두환 대통령의 가봉 방문에 대한 답방으로 849월 방한했고, 김영삼 정부(96), 노무현 정부 당시(2007)에도 방한했다.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가봉의 따봉아니 대통령이었다. 한국의 대통령이 수차례 바뀔 동안 그는 계속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도대체 얼마나 오래 해먹었다는 소리인가?

죽을 때까지 해먹었다. 봉고는 무려 42(196712~2009) 동안 대통령의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났다.


오마르 봉고의 뒤는 또 다른 봉고가 이었다. 그의 장남인 알리 벤 봉고는 2009830일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41.7%를 득표해 당선됐다. 세습 성ㅋ공


봉고는 사실상 독재자이나,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가봉을 아프리카에서 1인당 GDP가 가장 높은 국가 중 하나로 끌어올렸고 내전이나 분쟁 없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이끌어왔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봉고 대통령은 42년간 집권했다. 그 유명한 리비아의 독재자 카다피(행년 69)42년간 집권했다. 이들보다 더 오래 집권한 인물이 있다. 김일성(향년 82)이다. 김일성은 49년 동안 집권했다. 하지만 그도 최고봉은 아니다. 더 오래 해먹은 사람이 있다. 바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피델 카스트로(86)이다. 피델 카스트로는 19592월의 수상 취임 이래 2008년 국가평의회 의장직을 물러날 때까지 52년간 쿠바의 최고지도자였다.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끌어 195911, 바티스트 정권을 전복시킨다. 바티스트 정권은 부패한 친미 정권으로 인식됐다. 식민지 독립 후 토지가 미국 자본에 집중 돼 쿠바 경제가 미국에 예속화되고, 일반 국민들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음에도 바티스트 정권은 미국에 비호 하에 이를 방기했기 때문이다. 또한 대학과 언론과 의회를 통제하는 반민주 행태를 보였고 막대한 돈을 착복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쿠바 국민들은 카스트로를 환영했다.


그는 이후 마르크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 정치적 계획을 시행한다. 토지개혁(19595, 196310)과 산업국유화(196010) 시행했고 의료와 교육 역시 공적영역에 머물게 했다. 카스트로의 공으로 꼽히는 것은 수십 차례에 거친 암살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미국 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점, 빈부격차를 없애려는 시도를 했고 일련의 성공을 거뒀다는 점이다. 그러나 정권을 지속하기 위해 언론 탄압을 지속한 점, 친족에게 정권을 세습한 점을 비판받아오고 있다. “빈부격차를 없앤 방향이 다 같이 가난해지는 것 아니었냐는 지적도 있다.









장기 집권자들에게는 나름의 명분이 있다. 카스트로의 명분은 사회주의 혁명 체제의 안정화,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이었고, 봉고의 경우 경제발전이 명분이 됐다. 박정희의 명분도 경제발전이었다.

 

실제로 박정희의 집권기간 동안 높은 경제성장률(연평균 경제 성장률 9.1%)을 기록했고, 인프라가 구축됐다. 박정희의 관 주도의 경제 정책이 시대정신과 맞아들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그의 경제 정책이 대외의존도를 심화시켰고, 현재 심각한 양극화의 단초가 됐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또한 박정희 정권 동안 무고하게 죽은 시민들, 살해위협에 시달렸던 박정희의 정적들 문제도 여전히 뜨거운 논쟁 거리로 남아있다. 목숨, 즉 생명권은 인권 중에서도 가장 우선시되는 가치다. 박정희 대통령이 많은 독재자가 그러했듯 장기집권을 위한 인권탄압을 벌였다.








윤보선과 최규하는 한국 근현대사 속에서 잉통령으로 꼽히곤 한다. 짧은 집권기간, 미약한 존재감 때문이다. 윤보선은 2년 정도 집권했으니 그나마 최규하보다는 나을지도 모르겠다.


최규하는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사망하자 대통령 권한 대행을 수행했고, 1979126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10대 대한민국 대통령이 됐다. 그러나 바로 다음 해, 뭘 해보기도 전인 1980816일 신군부에 의해 대통령직을 사임해야 했다.

 




최규하를 물어나게 했던 신군부의 수장 전두환은 여러 숫자 연관이 많은 사람이다.

전두환 집권 당시 각 방송사는 오후 9시를 알리는 소리 이후 무조건 "전두환 대통령은..."이라는 말로 뉴스를 시작했다. 무조건 전두환 내외의 소식이나 전두환 내외 관련 행사를 가장 먼저 보도한 것이다. 심지어 198391, 소련군이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시켜 250여명이 사망한 중대사고가 있던 날도 전두환이 그날 뭐했는지에 대한 뉴스를 첫 꼭지로 보도했다고 한다.






대법원은 97417일 전두환에게 5·17 쿠데타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진압 문제 책임을 물으며 내란수괴죄’, ‘내란목적살인죄’, ‘반란수괴죄로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선고했다. 검찰은 1980512일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보안사는 '비상계엄 전국확대' , '국회 해산' , '비상기구 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기획했고. 5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시작으로 국회와 내각의 기능을 무력화하고 군부를 내세워 정권을 장악하려 했다고 밝혔다. 광주 시민은 신군부의 5.17 쿠데타에 항거했고 신군부는 '과감한 방법으로 시위대를 타격'한다는 전제하에 시국수습방안을 실행했다. 이 과정에서 약 200명의 광주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971222, 그는 대통령 특별사면으로 풀려났지만 추징금은 사면대상에 포함되지 않았다. 전두환은 2205억 원의 추징금을 납부해야 하지만 그는 자신의 통장에 29만 원밖에 없다고 주장하며 납부하지 않고 있다. (노태우는 90%이상 납부) 그런데 신기하게도 큰 집에 살며 골프를 치는 등 호의호식하며 지내는 걸로 보인다. 얼마 전 그의 손녀는 모 호텔에서 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내가 어린 시절 노점상을 해봤는데” “대학다닐 때 재래시장에서 환경 미화원을 했는데” “나도 학생 때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면서 고통을 겪었는데” “나 자신이 한때 철거민, 비정규직이었는데” “내가 배를 만들어 봐서 아는데해보신 것이 참 많은 분이다. 그렇게 여러 경험을 해봤으면,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아는 배려심 넘치는 큰 어른이 될 법도 한데,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대학 등록금 문제에 대해 장학금 받으면 된다고 하신 것과, “근로자는 자원 봉사하는 심정으로 일해야 한다.”고 말한 것만 봐도 남의 속도 모르고 그냥 막말하시는 듯.

그 분이 누구신지 모르는 독자는 없을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좌표 찍어드리겠음ㅇㅇ-> CLICK  (글 잉집장 | 그림 Slump)









※ 월간잉여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