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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스포츠

영화 <청춘유예>: 이 미친 세상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해 (인시)


영화감독 안창규는 세대 노동조합인 청년유니온의 설립 소식을 듣고 카메라를 들었다. ‘이 미친 세상에 길들여진 그래서 청춘을 유예당한 청년들의 이야기는 삼엄하지 않았다.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장르를 표방해 편집적 우연을 스크린에 끌어왔고, 가공이 적은 화면은 날카롭지만 또렷했다. 전반부는 몇몇 조합원들의 이야기가 흡사 인간극장처럼 구성되며, 후반부는 청년유니온의 활동 모습을 담았다. 이들의 분투엔 발랄함이 있었지만 깊은 상처는 모두의 것이었다. 영화는 우리 사회 중요한 목격과 질문을 담고 있다.


영화는 유치원 입학부터 대학 졸업 그리고 취업에 이르는 지극히 정상적인 일생을 공장 컨베이어벨트에서 돌아가는 제품에 비유해 시작한다. 그것도 애니메이션으로 말이다. 그곳에서 사람은 제품이 되고, 대학 졸업장은 바코드가 된다. 이 센치함 혹은 직설은 영화의 시선을 암시한다. 영화는 처음부터 말하고 싶어 한다.


만져보지도 않은 허공 속의 돈은 그 컨베이어벨트의 대가였다. 좋은 제품들은 스스로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바코드를 받기위해 돈을 지불해야 했다. 제품들은 서로를 밀쳐내고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이 토스트기인지 그 열로는 빵을 구울 수 없는 텔레비전인지 모르고 말이다. 그것을 알려면 저 벨트에서 나오거나 다 같이 멈춰야 하는데 공장장은 그 속력을 높일 뿐이다. 자칫 뛰어내리려면 다칠 수 있고 다 같이 멈추자고 말하는 찰나 제품들은 이미 바코드를 받고 있다. 연대해 짱돌을 들라는 한 경제학자의 말은 5년이 지났다.


송화진은 16백 만원을 지불했다. 아니 남의 돈을 빌려 냈다. 두부 한 모를 반으로 나눠 두 끼니를 해결해야 하지만 이 사회에서 졸업장은 절실했다. 종일 상어 고기가 들어가는 개 사료 만드는 일을 하다, 집에 와서 동생이 먹은 라면 그릇을 한참 쳐다봤다는 그의 고백은 누구나 처음 들어본 이야기다. 그는 그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카메라는 그저 응시할 뿐이다. 응시의 인내는 하루하루를 감내하며 매 순간 작은 다짐을 해야 하는 전화 상담원, 바코드를 받은 지 오래지만 자리를 찾지 못한 언론사 준비생, 바뀌지 않는 현실에 체념하지 않으려는 한 영화감독의 이야기까지 지속된다. 그들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웃는다.


그 응시의 카메라는 30분 배달을 지키려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피자 배달원의 사연부터 적극적인 질문으로 전환된다. 그 죽음은 우리 사회의 날 것을 그대로 보여준다. 동료를 떠나보낸 배달원은 빗속을 뚫고 2분 남기고 간신히 배달을 했는데, 손님은 본인 입 속에 피자가 들어오기까지 시간을 셈하면 30분이 넘었다며 공짜 피자를 요구했다고 한다.

 




슈퍼히어로인 스파이더맨도 늦은 적 있는 피자 배달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해라는 가사가 반복되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졸업은 그때 나오기 시작한다. 100년 전 톨스토이는 연극 무대 장치를 만들다 사람이 죽자 어떻게 예술 때문에 사람이 죽을 수 있냐고 탄식 했다고 한다. 영화는 어떻게 피자 때문에 한 청년이 죽을 수 있냐고 끊임없이 묻는다.


구조가 투박하고 중첩과 빈 공간이 어색하나, 묵직한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성공한 영화라고 말하고 싶다. 비록 의도와 장치가 제대로 발현되지 않아 극적인 느낌은 많이 상쇄됐지만, 일관된 시선은 목격이라는 측면에서 유효하다. 지금 언론은 잘 하지 못하는 것이다. 더구나 출연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웃고 있었다. 참혹한 현실 자신의 이야기에서 우습게도 웃음이 나오는 것이다. 이 우스운 웃음을 포착한 것은 의미가 깊다. 그것은 카메라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그녀가 아니라 저널리즘이 상실된 세상이 아닐까 한다. 그 측면에서 영화감독들이 만들어가는 새로운 저널리즘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최근 일련의 영화계 저널리즘은 그 옛날 출입처 시스템에서 소외된 방송국 PD들이 현장에 나가서 찍어온 것을 봤을 때 느낌과 비슷하다. 그때도 진실이라는 목마름이 있었다. 여기에 시나리오와 영화적 기술이 붙으니 꽤 흥미롭다.


영화 청춘유예는 이 사회 컨베이어벨트에 대한 질문이다. 지금까지 던져진 해답은 많지만 그것은 다른 곳에서 온 것이다. 또 아파도 시간 많으니 견디라는 말밖엔 없다. ‘이 미친 세상에 어디에 있더라도 행복해야해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이 미친 세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낙관한다.




 

청춘유예 (2012) 中








※ 월간잉여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