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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취업 수난기 (측쿠시)


 

월잉 독자위원들과 만나 함께 다짐한 게 있다. 월간잉여가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으니 재미있는 글을 쓰자고, 짤방도 모으고 블랙 유머도 연구해서 열심히 웃겨보자고. 미안하다. 그 약속 못 지킬 것 같다. ‘나의 취업 수난사를 어떻게 웃기게 쓸 수 있으랴. 지난 1, 빈속에 쓰린 소주 들이켜는 기분으로 살아왔다. 슬픈 이야기가 될 것 같다. 그래도 써야겠다. 어딘가에서 취업 못하는 자신을 책망하며 울적해하고 있을 누군가를 위해.

 


2011년 겨울. 초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P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사인은 자살. 그 해에 대학을 졸업한 P는 열심히 취직 준비를 하고 있었다. 봄에는 기업에서 인턴을 했고 여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며 토익 학원에 다녔다. 가을에는 하반기 공채에 지원했을 것이다. 친구들한테 앓는 소리 한번 하지 않았던 P였기에 잘 지내고 있는 줄만 알았다. 장례식장에서 만난 친구들은 하나같이 P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몸에 좋은 것만 챙겨먹으며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 것처럼 굴던 그가, 사흘밤낮 단식투쟁을 해서 어학연수 허락을 받아 낼 정도로 자신의 의지대로 살고 싶어 했던 그가 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도대체 취업이 뭐라고. 시뻘건 가슴에 칼로 새긴 듯한 물음표를 안고 틈날 때마다 들여다봤다. 그의 죽음을 이해해야 주변에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백수 생활 1년차, 이제는 좀 알 것 같다. 나 역시도 P를 따라가고 싶은 순간이 있었으니까.

 


20121. 출발은 나쁘지 않았다. 매일 아침 7시에 일어나 후다닥 밥을 챙겨먹고 토익학원으로 향했다. 강의가 끝나고 나면 학교에 가서 밥을 먹었다. 마치 오전부터 나와서 일하고 있었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다른 과 조교들과 젓가락을 섞었다. 일과가 끝나고 나면 도서관에 가서 미친듯이 토익 문제를 풀었다. 상반기 공채에 지원하려면 무슨 일이 있어도 2월까지는 토익 점수를 올려놔야했다. 하루에 6시간 이상 토익에 투자하며 닥치는 대로 듣고 풀고 외웠다. 그리고 기대하던 2월의 첫 시험. 800점도 안 되는 점수가 나왔다. 망할. 그 다음 시험도 별로였다. 망할 망할. 똥줄이 타고 심장이 쫄깃해지는 순간까지 애를 먹이더니, 역사적인 226일 시험에서 어느 정도 통용되는 토익 점수를 받았다. 앞으로 다시는 YBM에 돈을 갖다 바치지 않으리라 결심했다. 그러려면 토익 만기가 돌아오기 전까지 취직을 해야겠지만.

 

3. 계약직 조교 일을 끝내고 드디어 백수가 됐다. 모아놓은 돈도 있으니 이제 열심히 언론사 준비만 하면 된다. 홀가분한 마음도 잠시, 외로움이 밀려왔다. 느지막이 일어나 텔레비전을 보며 혼자 밥을 먹었다. 도서관에 있는 10시간 동안 나는 혼자였다. 집에 오면 식구들은 다 자고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스터디원들과 만나는 시간이 그나마 말을 오래 섞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외로움에 지친 나머지, 나는 혼잣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숨을 쉬면서 중얼거렸다. 도서관에서 나 같은 증세를 가진 사람을 발견하더라도 너무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라. 그들은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서라도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것뿐이다.

 

4. 도서관에서 후배들 마주치기 싫어서 다른 학교로 피신한 지 한 달째, 사람에 대한 그리움보다 소속에 대한 욕구가 더욱 커져갔다. 어떤 신문사든 좋으니 빨리 가서 명함 파고 저는 어디어디의 땡땡땡 기자입니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마침 언론사 공고가 한참 쏟아질 때였다. 미친듯이 쓰고 미친듯이 떨어졌다. 딱 한 군데에서 최종면접을 보기는 했다. 면접자는 6명인데 주어진 시간은 단 십분. 그래도 그 짧은 시간에 뭘 보여주겠다고 누구는 태권도 포즈까지 취하며 애를 썼다. 모두가 속으로는 달달 떨며 팔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현장에서 직접 취재해서 기사도 쓰고, 저녁에는 기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며 맥주 면접을 치렀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니 마치 내가 그 언론사의 기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애국심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는 내가 그 회사에 애사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집에 돌아오는 길이 더욱 쓸쓸했다. 12시 종이 울리면 마법이 풀리는 신데렐라처럼, 나도 내일 아침 눈을 뜨면 다시 취준생으로 돌아가 있을테니까.

 

5. 가장 가고 싶었던 언론사 시험에서 떨어졌다. 5년 전, 기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던 순간부터 점찍어뒀던 언론사였다. 심장이 욱신욱신했다. 이 놈의 언론사 시험, 개나 주라지. 술에 취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조금 울었던 것 같다.

 

67. 공채 비수기. 내가 원했던 언론사의 시험은 다 지나간 뒤였다. 언론사 준비를 계속 할지 여기서 멈춰야할지 고민했다. 친구들을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그제서야 친구들도 자신들의 취업 수난사를 들려줬다. 다들 별 말이 없길래 뚝딱뚝딱 원서 써서 취직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거듭된 낙방 끝에 꿈과 욕심을 버리고 겨우겨우 들어간 회사였다. 만만한 삶이란 없었다. 선배, 교수님도 만나 조언을 청했다. 누구 하나 똑 부러지는 결론을 내려주는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절이었다. 23일 템플 스테이를 하며 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다시 한 번 도전해보기로.

 




고일권씨가 그린 금산사





8.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생활을 하려고 아침에 수영을 다녔다. 스터디도 새로 구했다.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나도 자극 받아서 열심히 글을 썼다. 왠지 조짐이 좋았다. 이대로만 가면 올해 안에 언론사에 입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토익 스피킹 학원도 다녔다. 요새는 토스 없으면 못 쓰는 기업도 많다기에. 6개월 만에 YBM의 호갱님으로 복귀해서 돈을 듬뿍 퍼드렸다.

 

910. 천국에 닿을 뻔 했다. 간만에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꽤 큰 언론사였다. 성향은 나와 전혀 안 맞았지만 500명 수험자 가운데 50명 안에 들은 것이 기뻤다. 내 실력을 인정받은 것 같았다. 그래도 면접에서 떨어졌으면 했다. 마음에도 없는 글로 밥 벌어먹고 살기는 싫었다. 그런데 면접 준비를 하면 할수록 가고 싶다는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연봉을 알고 나니 그렇게 싫어하던 논조도 괜찮아보였다. 사상 검증에 대비해 그들이 좋아할만한 논리로 정신을 무장하고 답변을 외워뒀다. 운명의 D-day. 느낌이 좋았다. 사상검증도 무난히 피해갔고, 내가 하고 싶은 말도 다 했다. 심사위원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간절히 기다리던 합격자 발표날. 나는 또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결과는 탈락. 윤창중 대변인의 말마따나 정치적인 창녀가 된 기분이었다. 여태껏 써왔던 글과 정반대로 대답 하면서까지 내 노동력을 팔려고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 돼 있었다. 나는 지옥으로 떨어졌다.


지옥에서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고 애썼다. 10월 중순이 되자 언론사 하반기 공채도 뜨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토익 스피킹 점수를 발판삼아 대기업 자소서를 쓰기 시작했다. 남들은 하루에 자소서를 서너개도 쓴다는데, 나는 보름동안 기껏해야 스무개 밖에 쓰지 못했다. 자소서를 쓰는 과정이 고통스러웠다. 내가 하려는 일이 글과 관련된 게 아니라면 덜 고통스러웠을 지도 모른다. 합격한 선배들의 자소서를 받아서 읽어보니 여기도 굽신, 저기도 굽신이었다. 당신네 회사에 들어가서 몸과 영혼을 바치겠다는 글을 써야하는데 도무지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았다. 자기소개서를 하나 완성할 때마다 내 인생 전체가 비굴해지는 느낌이었다. 존재에 회의감이 들었다. 아침마다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시간이 늘어났다. 일어나서 세수하고 밥 먹고 청소하고 도서관가는 게 힘에 겨웠다. 이대로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으로 잠들어서, 눈뜨면 땅으로 꺼져버리고 싶었다.

 

11. 대기업 공채에서도 모조리 떨어졌다. 나는 죽음을 떠올렸다. 주변 사람들과 비교해보니 내 자신이 너무 형편없었다. 졸업한 지 3년이 다 되가는데 취직을 못 했다는 사실이 내 열등감의 근원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여기는 것 같았다. 한 번은 조교하던 사람들과 술을 마셨는데 친하게 지내던 오빠가 요즘 뭐하냐고 묻길래 도서관에서 혼자 공부한다고 했더니 ~ 히키코모리처럼?” 이라고 대답해서 눈물이 핑 돌았다. 원래부터 디스 개그 하던 사이였는데, 그 날은 유독 아팠다. 조그만 가시를 던져도 도끼가 돼서 돌아오는 시기였다. 이후로 사람들을 피했다. 열등감을 느끼지 않으려면 비교할 대상이 없어야 했다.


P의 기일이 돌아왔다. 꾸역꾸역 길을 나섰다. 그의 유해가 묻힌 나무 아래에 조촐한 제사상을 차렸다. 친구들과 막걸리를 마시며 P와 함께한 나날들을 떠올렸다. 내 상태를 알리 없는 한 친구는 돈도 안 되는 기자질 하겠다고 나서지 말, 편하게 좀 살라며 지적질을 해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로 기분이 나쁘지가 않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니 기준으로 내 삶을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교까지 합쳐서 16, 교육 받는 내내 성과로서 내 존재를 증명하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나는 1등이 좋았고, 선생님의 관심이 좋았다. 그러다보니 인정해줄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는 패닉 상태에 빠졌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게 더 자유에 가까웠다. 내게는 길을 잃고 내 멋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유가 있었다. 소속, 평가, 인정. 그런 거 개나 주라지. 한겨레 신문? 동아일보? 그까짓 타이틀 안 달면 어때. 나는 내 자신으로서 글을 쓰면 되는 거다. 세상이 나를 외면해도 괜찮다. 영원히 떠나지 않을 단 한 사람. 내 자신에게만 진실한 삶을 살면 된다.

 

지금 되돌아보니 P가 보이지 않는 힘으로 나를 도와준 게 아닌가 싶다. 2012년 늦가을, 나는 내내 P를 떠올렸고, 그의 죽음을 이해하며 그의 세계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의 유해와 가까워진 순간, 신기하게도 다시 삶의 에너지가 차올랐다. 넓고도 깊고 모양으로. 아마도 P는 더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내가 마신 막걸리에 그녀의 염원이 담겨 있었던 것 같다.

 







급잉여가 된 주인공이 고인의 마지막을 배웅하는 일을 하며 겪는 변화를 담은 영화 <굿바이>(2008)



2013. 출발은 나쁘지 않다. 이제는 KBS한국어능력시험이 만료돼서 한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 YBM 대신 한국방송공사에서 호갱님 노릇을 하고 있는 중이다. 최근에는 글과 관련된 알바를 시작했다. 종자돈 떨어져서 어쩌나 싶었는데, 어떻게 운이 닿아서 괜찮은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어쨌든 나는 여전히 취준생 잉여다.

 

사실, 일년치 삶을 드러낸다는 게 꽤나 쪽팔리는 일이다. 구질구질하고 찌질한 일상 얘기하면 뭐하겠나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은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알리기 위해서다. 널리고 널린 게 취준생 잉여다. 스스로가 쪽팔리니까 말을 않고 사는 것일 뿐일 뿐이다. 그러다 병 된다. 친구를 붙잡고 얘기하든, 월잉에 투고를 하든, 아니면 나에게 인터뷰 요청이라도 해달라. ‘의 취업수난사를 우리들의 취업수난사로 이어가고 싶다. 아무리 우울하고 족같은 상황이 와도 살아달라. 나도 이렇게 살아가니까 당신도 살아달.










※ 월간잉여 11호(창간 1주년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