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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경영하는 어항 보고서(글_유경은)

잉여로서의 삶이 길어진다는 것은 긍정이 창문으로 나가고 우울이 문틈으로 스미는 것을 의미한다. 대한민국 제일의 신분인 고 3 때도 개와 함께라 나는 그 시절을 그리 힘든줄 모르고 보냈었다. 옆집 우울한 아주머니도 친구의 아버지도 모두 무언가를 키우며 우울을 떨쳐냈다고 했다. 대개의 가족이 그런 것처럼 우리 가족도 사실 잉여에게 큰 힘이 되지는 않는다. 투쟁의 대상일 뿐. 그래서 올해의 나는 결심했다. 잉여지만 무언가를 키워보기로.


페릿프레리독라쿤토끼친칠라기니피그손다람쥐아르마딜로개미핥기 끝으로 하늘 다람쥐까지 폭풍 가위표를 한 나의 최종 선택은 생선이었다. 초심자니 1도의 고저에 죽고 사는 열대어나 염도를 맞춰줘야 하는 해수어는 몰살하기 좋을 것 같았고, 구피는 무한 증식했던 경험이 있어 베타를 키우기로 했었다. 베타는 태국에서 온 투어로 지느러미가 화려한 수컷을 주로 키우는데 한 마리 이상 키우면 한 쪽이 죽을 때까지 싸워서 아주 딱 좋았다. 한 마리 키우기.


여럿을 키우는 물고기들은 번식도 잦고 공간도 많이 필요하다. 손도 많이 간다. 나는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 강도를 줄일 수 있을 크기의 어항에 사는 적당히만 섬세한 물고기가 필요했다. 베타는 플레어링이라는 다른 베타를 위협하는 행동도 해 거울을 비춰주며 키우는 잔재미도 있어 보였다. 무척 예쁘기도 했다. 동물에 대한 정보가 필요할 때면 찾는 DC인사이드의 물고기 갤러리에서 많은 유동닉들이 베타 어항 견적을 내달라고 나대신 일찍이 문의해둔 것도 나의 선택에 한 몫 했다. 이 갤 저 갤을 떠도는 유령으로 살던 나는 주민등록번호도 기입하지 않고 손쉽게 정보를 얻었다. DC라서 불편한 점도 있지만 물고기 갤러리는 정보가 많아 공지 꼼꼼히 읽으며 며칠만 머물러도 물초보가 물고기를 쉬이 용궁으로 떠나보내지 않을 수 있다. (, 뭔가 궁금하다면 묻기 전에 검색부터 해야 한다. 안 그러면 욕으로 후려쳐져 생명 연장의 꿈에 다가갈 수 있다.)


호화로운 어항이야 물갤러들 글과 네이버 블로그를 보면 되고, 나는 내 베타가 살기 좋고 나도 베타보기 좋은 아기자기함만 있으면 됐다. 해서 고르고 고른 물품들이 다음과 같았다. 둘째 줄까지는 필수지만 나머지는 선택이지 절대적인 건 아니라는 것을 미리 밝혀둔다.




베타항 준비물

20큐브(가로세로높이가 모두 20cm) 아크릴 수조

히터, 온도계, 쌍기 스폰지 여과기, 2구 저소음 에어모터, 에어호스, 스포이드

클립형 독서등, 스킨답서스 1, 음성수초 미크로소리움, 알몬드 잎 티백

그리고 베타와 테트라 비트, 건조 짱구벌레

 







1:www.fishprice.net을 가면 가격비교를 할 수 있지만, 이 정도는 한 군데 정해서 사면 수질 정화제나 에어호스, 물고기 응급약 엘바진 등을 사은품으로 받을 수도 있으니 좋다.

2:베타는 히터가 필요 없다는 의견도 있지만 베타도 열대어다. 물의 일정 온도 유지는 매우 중요하다. 물의 PH 유지를 위한 알몬드 잎도 있으면 베타의 안정에 도움이 된다. 바닥재는 선택이지만 보통은 바닥재 없는 항이 베타의 배 지느러미에 좋다고 한다. 깔면 슬러지도 적고 좋긴 하다.

3:베타는 고인 물에 살던 물고기라 보통 물살을 세게 만들지 않는 스폰지 여과기를 선택한다. 헌데 스폰지 여과기만 사면 물 안에 수세미만 있는 거다. 에어모터와 여과기와 모터 사이를 잇는 에어호스에 밑줄을 쳐두자.

 


물고기를 키우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다고 한다. 물고기들의 아름다운 움직임을 보는 것도 즐겁고 물을 본다는 것이 우리가 답답할 때 바다나 강에 가듯이 마음이 좋아진다고. 그래서 일까. 어항이 도착한 날, 나는 고작 20큐브 어항에 물을 담으며 호숫가에 온 듯 마음이 편해졌다. 내 물고기의 신수조증후군(새 어항에서 여과세균이 미처 형성되지 않아 물고기에게 유해한 암모니아 등이 생성되는 현상)을 막기 위해 미리 어항의 물을 잡는 동안 잠도 못 자게 우웅웅 목 놓아 우는 '저소음' 모터를 휴지로 말아 파우치에 처넣으며 나는 조금 들떴던 것 같다.

나의 물고기는 베타를 데려오자 마음먹고 오가며 봤던 수족관에서 데려왔다. 4마리가 나란히 작은 플라스틱 컵 안에 있었는데 몸은 반쯤 까맣고 꼬리는 하느작 파란 지금의 내 물고기가 제일 열심히 그 좁은 안에서 헤엄치고 있었다. 와서는 고민을 좀 했다. 열흘은 물 잡기 충분한 시간은 아니다. 2주나 길게는 3주 정도면 적당할까. 수조에 한두 컵 정도라면 수돗물을 바로 넣어도 폐사하지 않는 베타라지만 그래도 신경써주고 싶었다. 이제는 부모님 아니라 내가 운영하는 어항이니 잘 해볼 거라는 오두방정으로 물갈이용 둥근 수조 물은 또 따로 만들고 있었는데 임시로 거기에 넣어주었다.

느릿느릿 헤엄친다는 말과는 달리 파란 베타는 수조 안을 격하게 돌았다. 첫 이름은 이탈리아 호러 영화 감독 다리오 아르젠토의 성을 따서 아르젠토. 근사한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이놈이 밥을 아주 죽어라 안 먹었다. 같이 사온 테트라 민 사료를 먹고 뱉어내길 반복. 데려오고 나서 이틀이 흘렀다. 그 때 몸살이 나서 버스타고 물고기 밥 사러 가는 길이 너무 험난했다. 굶기자니 우리 엄마가 밥 없다고 나 굶기는 건 아니니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고기 치어는 계란 노른자를 물에 풀어주면 곧잘 먹으니 먹여보자 했다. 이쑤시개로 깨알만큼씩 떼어주자 족족 받아먹었다. 아르젠토의 이름은 노른자가 되었다. 다시 사온 테트라 비트 사료는 없어서 못 먹는다.

물은 삼일에 한 번 하루 묵힌 물(이틀 이상 묵힌 물은 썩기 시작한다)에 알몬드 잎을 띄워 갈아주고, 먹이는 하루 한 번, 물 밑에 끼는 슬러지(정수 과정에서 생기는 찌꺼기)와 똥을 스포이드로 치워주면 물도 오케이. 참 쉽죠?

 

아크릴 어항으로 가자마자 장가 보내달라고 거품집을 만들며 시위하는 베타남자1호와 그를 고깝게 보는 잉여자1호는 빠르게 물생활에 익숙해졌다. 지금은 노른자에서 또 바뀌어 물깡패라고 부른다. 처음 왔을 때부터 먹이나 짱구벌레 급여를 수면 가까이서 아니면 핀셋으로 직접 줘버릇 하니까 수면 근처에 뭐가 어른어른하면 튀어서 쫀다. 총 그냥 쏴도 되는데 한 바퀴 구르고 쏘는 안젤리나 졸리처럼 누가 물깡패 아니랄까봐 밥을 괜히 구르며 먹는다. 별별. 얼마 전엔 여과기 기포 나오는 구멍 안에 머리 들이밀었다 끼어서 푸드덕 대는 걸 구출한 적도 있다. 내가 잉여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다. 진짜 별별. 식구는 모락모락 늘어 물갈이용 둥근 어항에는 까다로운 남자 물깡패가 삼키지 못하고 뱉었던 테트라민을 열심히 먹는 물달팽이 두 마리와 야마토 새우 두 마리가 같이 살고 있다. 에어모터 2(기포 구멍 두개)를 샀던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물깡패 성격이 깡패라 달팽이도 쪼아 룸메이트도 없이 살 팔자였다. 서로 다른 어항에 있지만 (나 포함) 나름들 즐겁게 살고 있다.

자꾸 이번엔 빨간 베타를 들여와 한 어항 더 늘이고픈 마음이 슬금슬금 자라나는 것만 빼면.












※ 월간잉여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