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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녀의 사랑과 전쟁(글_낭만얄캥이)


이쁜년은 끊임없이 승리를 거두고, 루저들은 배경이다.


월잉 5월 호에서 이현탁 님이 쓰신 잉여남의 사랑과 전쟁에서 잉녀의 연애에 대해 한 누님이 했다는 말이다. 누군가 보론으로 잉녀의 사랑과 전쟁에 대해 써주길 바란다며 슬쩍 빠져나갔는데, 마치 반론을 제기하라고 남겨둔 말 같다.


난 이 말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 난 주변에서 얼굴 반반한 여성들의 비참한 최후를 빈번하게 목격해왔다. 반대로 흔녀들의 연애 성공담도 지켜봤다. 누군가 세상에는 N개의 연애가 있고, 그 모양이 다를 수는 있어도 지배적인 흐름은 있다고 반론을 펼 수도 있겠다. 물론 연애시장에서 '이쁜년'들이 선택의 기회가 많은 건 사실이다. 가만히 있어도 이 남자 저 남자 집적대는 인간들이 많으니까. 그런데, 그게 다 인가? 연애의 기회가 많은 것과 연애에서 승자가 되는 것은 다른 얘기다. 연애를 잘 하기 위해서는 관계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정신과 능동적인 태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 이런 자기계발서 같은 말 안 좋아하지만, 달리 표현할 말이 없넼. 잉녀의 사랑과 전쟁,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intro. 누가 더 지랄맞은 연애를 했던가

2년 전이었던가, 잉여기를 보내고 있는 친구와 감자탕 집에서 소주를 마시며 시덥지 않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학다니는 내내 누가 더 지랄맞은 연애를 했는지에 대해 심각한 토론을 벌였다. 좀처럼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앞에 앉은 친구는 철없는 남친 뒷바라지 하느라 3개월 동안 300만원을 날려버린 역사가 있었으며, 옆에 앉은 친구는 4CC였던 훈남오빠를 꼬여내서 사귀었다가 남친이 '어린 년'과 바람난 현장을 목격해 1년 동안 식물인간 상태로 학교를 다녔드랬다. 그 자리에 없는 년은 4년 내내 도도함을 유지하다가 정작 제대로된 연애는 한 번도 못해보고, 사회에 나가서 나잇살 꽤나 먹은 싱글남한테 기 빨릴 뻔 했다. 써 놓고 보니 죄다 만신창이네. 나름 학부에서 상위 10%를 가뿐히 상회하는 얼굴들인데도 그랬다. 우린 도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무던히도 알콜을 빨았더랬다. 그건 일종의 품앗이였다. 친구 옆에서 헤어진 남자의 단점을 집합해 죽일 놈으로 만들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었다. 연애할 때는 코빼기도 안 비쳐도 헤어지면 절친돼주기는 무언의 약속이었다. 누가 언제 망한 연애담을 들고 올 지는 예측할 수 없으므로, 일단 눈 앞에 있는 친구를 위로해주면서 미래의 품앗이를 보장받는 거다. 다음은 그 중 품앗이의 대부였던 한 친구의 이야기다원피스의 나미같은 포스를 풍기던 그녀였으므로 '나미'로 칭하기로 한다. (요즘은 회사일에 쩔어서 예전만 못하다)

 




원피스 나미





원피스 나미 피규어







#. 그녀가 복학생의 차지가 된 이유


  나미양은 미모가 출중했다. 나이스바디에 뚜렷한 이목구비를 갖고 있었으며, 성격도 좋았다. 당연히 복학생 오빠들이 가만 놔둘 리 없다. 동기들 중에서도 몇 몇은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그녀의 포스가 남다르거니와, 일단 동기들은 어수룩했으니까. 술값 님이 지난 호에서 묘사했듯이, 대학 신입생 남자 잉여들은 좀처럼 들이대질 못한다. ‘건축학 개론에 나오는 이제훈처럼 도둑 키스를 해놓고도 막상 고백할 타이밍이 오면 주춤주춤하다가 병신같이 주저앉고 마는 경우가 허다하다. 여자들이 속으로 야 이 병신아!! 지금 고백을 하라고!!’ 절박하게 외쳐도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다. 그녀를 둘러싼 복학생 형들에 비하면 자기는 쭈글이 같고 뭔가 모자라보인다. 그럴 수 밖에. 복학생 형은 차도 있고, 돈도 있고, 옷차림도 세련됐고, 무엇보다도 여자를 꼬셔야겠다는 의지가 충만하다. 자기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는 신입생들을 지금 꼬시지 않으면, 나중은 없다는 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막 들이댄다. 일찌감치 그들의 레이더에 포착된 신입생 이쁜이들은 결국 못 이기는 척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얼굴 좀 못생겨도 적극적이고 위트있는 복학생 선배들이 학기 초반에 이쁜년들을 쓸어가는 이유다.






그렇게 뻘쭘한 표정 짓지 말고, 어서 고백을 하란 말이다!

 


나미양의 패턴도 다르지 않았다. 학회에서 그녀를 쫓아다다니던 복학생 오빠와 연애를 시작했다. 우리는 저 년의 눈은 발바닥에 달렸다고 비난했다. 나미양에 비해 그의 비주얼이 참담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난을 뒤로 하고 그녀는 복학생을 잘 만나고 다녔다. 알고보니 그는 참 괜찮은 남자였다. 일단 자기 여자한테 무조건 충성을 다했다. 그는 알바비 모아서 등록금을 내는 고학생이었음에도, 주말마다 특근을 해서라도 여자친구의 생일에 MCM지갑을 사주는 남자였다. (물론 그녀도 그에 못지 않은 씀씀이를 보여줬다.) 이쯤에서 된장녀 마인드라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면, 그냥 그 마음 씀씀이가 예쁜 거다. 빠듯한 상황에서도 자기 욕구를 참아가면서, 여자친구에게는 가장 좋은 걸 주고 싶은 마음 말이다.

게다가 그는 그토록 희귀하다는 공감할 줄 아는 남자였다. 나미양은 좀처럼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재밌는 일은 신나게 공유하지만, 힘든 일은 혼자만 간직하곤 했다. 그런데 이 복학생 오빠가 질문을 던지면 마법의 주문처럼 그녀는 마음 속 일들을 줄줄 말하게 되더란다. 그러는 사이 나미양은 점점 그 남자에게 빠져들었다. 처음에는 얼마나 잘 하나 지켜나볼까?’하는 도도한 마음이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너 없이는 안돼로 마음이 기울어갔다.

 

달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 남자는 어학연수가서 연락을 뜸하게 하더니, 얼마 후 싸이에 다른 여자와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올렸다. 그녀는 그렇게 성의없이 차였다. 품앗이는 내 몫이었다.

 

다른 친구들도 차이고, 또 차였다. 아니면 차임을 유도당했다. 도대체 왜 그녀들은 처음에는 승자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불리해지는 걸까. 차이는 건 이쁜 년들의 숙명이란 말인가?

 




#. 남자도 사랑받고 싶다

 

내 생각에는 이렇다. 대학교 1학년 남자 동기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사랑을 주는데 미숙했던 거다. 처음에는 이쁘다고 쫓아다니는 남자 중에 괜찮은 듯한 놈을 골라잡는다. 그 남자는 여친한테 잘 보이려고 최선을 다 한다. 싸울 때마다 자기가 잘했든 잘못했든 자기의 탓이라며 싹싹 빌고, 무릎을 꿇는 굴욕도 참아낸다. 그러다가 여자가 서서히 마음을 열고, 몸과 마음이 친숙해지면, 남자는 한 시름 놓게 된다. 남자도 데이트 끝내면 얼른 집에 돌아가서 과제도 해야 하고, 친구도 만나고 싶고, 힘들 때는 이해받고 싶다. 그런데 여자의 높아진 기대치는 그대로다. 여자는 왜 예전처럼 집에 데려다주지 않느냐며, 변했다고 바가지를 긁기 시작한다. 그런데 생각해보자. 누군가한테 사랑을 주기만 하는 게 정상인가? 내리사랑은 부모가 자식한테만 줄 수 있는 거다. 그럼에도 연애초보 잉녀들은 남친한테 내리사랑을 갈구한다. 막판에 지친 그가 또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이유다.

 

남겨진 잉녀들은 고민한다. 얼굴도 못 생기고 잘난 것도 없는 남자한테 도대체 왜 내가 차였을까. 다음 번에는 더 좋은 남자를 만나겠다는 다짐으로 끝나기 쉽지만, 문제는 자신한테 있다. 남자도 사랑받고 싶다. 자신은 얼마나 남자친구에게 사랑을 주었는가? 실패한 연애에서 경험치를 쌓으려면 질문을 자신한테 던져야 한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상대방은 무엇을 원했는가,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나, 기타 등등. 여기에는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 나 좋다고 할 남자는 세상에 널렸다며, 조금만 성에 안 차도 상대방을 내치는 여자에게는 경험치가 쌓일 겨를이 없다. 그냥 연애 횟수만 늘어나는 거다. 못 생겨도, 성격이 안 좋아도, 한 사람에게 자신의 온 자원을 바쳐가며 지독하게 연애를 해 본 사람은 다르다. 내공을 쌓아서 스스로가 좋은 연애 상대자가 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 후, 진짜 사랑과 전쟁

대학교 3,4학년과 취업시즌 본격 잉여기를 거치며 지독한 연애를 했던 우리들. 친구들의 망한 연애를 새겨들으며 쌓은 간접 경험치까지 끌어모으며, 우리는 무시못할 내공을 쌓게 됐다. 이제 취직 한 지 2년 쯤 되자 이것들은 슬슬 결혼 준비를 한다. 나쁜 놈, 이상한 놈 만나며 실컷 시달려 보니 좋은 놈 골라내는 안목이 생긴 듯하다. 괜찮다 싶으면 바로 결혼 날짜를 잡는다. 나미양도 내년에는 결혼을 한단다. 어쩐지 씁쓸하다. 하지만 그 때부터 진짜 사랑과 전쟁이 시작될 거다. 혼수는? 집은? 애는? 양육은? 상상만해도 끔찍한 물음표다. 혹시 아나. 일찍 간 년이 일찍 돌싱이 될는지 크크(자음으로 바꿔주셈) 그러니까 난 천천히 갈테다!!

 












※ 월간잉여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