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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만화과 입시생의 연말(김불쏠)


난 그저 양손을 모아잡고 엄지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엄마도 쌤도 말이 없다. 7등급. 수도권은 안녕이다. 끝난 거다. 그나마 내가 넣으려는 학교는 언어 외국어만 보니 다행이지.

침묵을 지키던 선생님이 말했다.


"어머님, 등급 컷 보시면 아시겠지만 인서울 대학들은 아무래도 힘들고요. 벌써 성적 나온 거 어떡하겠습니까. 이제 실기에 올인해야죠."


엄마의 짧은 대꾸.

"실기해서 이성적에 갈 수 있는 학교나 있을까요? 그럼 갈수 있는 학교가 어디에요?"


"충청도에 중위권 학교들이 몰려있는 편인데요, 평택에 P, 천안근처엔 N, H, 공주에 있는 G대는 국립이라 학비도 싸고..."


쌤이 학교를 나열해 갈수록 엄마 얼굴이 점점 굳어져 간다. 그만큼 상담실 공기도 무거워져간다. 대충 몇 개 학교를 나열하고 나니 상담실엔 다시 침묵이 찾아왔다. 아 씨 온풍기를 켠 것도 아닌데 이노무 학원공기는 왜 이래 텁텁한 거야. 목이 건조해서 침을 삼키다 목울대 꿀렁이는 소리에 사래가 들렸다. 켁켁 대고 있는데 엄마가 나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러게 너는 엄마 말 듣고 공부나 하지 왜 만화 같은 거를 보고 그리고 쌩 난리를 치다가 성적 떨구고. 학교가 이게 뭐냐 이게? ? 이게 학교야 이게? 어디서 쌩 듣도 보도 못한 학교들 이거, ? 어디 동네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겠냐고."


엄마는 손가락으로 등급컷 안내서를 두드려 가며 격하게 반응했다. 그 순간, 쌤을 봤다. 충남 N대 애니과 출신인 선생님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쌤도 좀 그렇겠지. 애니계열에선 나름 중위권 학교인데. 엄마의 신세한탄은 폭풍처럼 쏟아졌다.


"아니, 선생님.. 이런 학교 나와 가지고 직업이나 가질 수 있어요? 얘 이래가지고 뭘로 벌어먹고 살아야 돼요? 만화 그려가지고 무슨 일을 해요.. 게임 그거 애들 하는 거 그림 그리면서, 애 아빠도 회사에서 부하직원들 보기 창피해가지고 이야기를 못해요. 아이고 세상에"


엄마는 관자놀이에 손을 대고는 얼굴을 묻었다. 쌤이 조용히, 하지만 쓰게 웃었다.

"뭘 하든 벌어먹고는 살게 됩니다, 어머님. 정말 막노동판에서 굴러도 사는 게 사람이니까요. 사람들이 무시하지만 않는다면요."


마지막 문장에 힘이 들어갔다. 뭐지? 고갤 들어서 쌤을 봤다. 표정이 심상찮다. , 안되는데. 저건 싸우자는 거다. 좋게 돌려서 말하고 있는데, 속으로 빡친 거야.


"어머님. 그림을, 그중에서도 애니계열을 택한 친구들은 다른 친구들이랑 달라요. 힘든 거 알면서, 정말 하고 싶은 걸 찾아서 온 친구들입니다. 못하게 한다고 해서 안하는 것도 아니고,죽이 되든 밥이 되든 손에서 펜을 놓을 수가 없는 사람들이에요. 무협지에 나오는 주인공들 같다고나 할까요. 먹고 사는 게 문제가 아니죠. 얼마나 더 내공이 쌓였는지, 이 무림에서 더 얼마나 올라섰는지, 같은 입장에 서있는 사람들에게서 얼마나 인정을 받는지,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겁니다. 하지만 이 친구들이 자기도 모르는 새 최종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건 누굴까요?"


엄마는 뚱한 눈으로 쌤을 바라보았다. 쌤은 답답하단 낯으로 잠시 엄마의 눈빛을 받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부모님입니다."

쌤이 손끝으로 돌리던 펜을 조용히 등급컷 안내서 위에 올려두고는 내뱉듯, 던지듯 말했다.


"제 나이가 좀 있음 서른 중반이 되지만 아직도 저희 부모님, 공무원 시험 보면 안되겠냐고 말씀하십니다. 안정적으로 월급쟁이로 사는 게 낫지, 왜 왜 그렇게 살려고 하느냐고요. 그렇게 하면 쪽박찬다고. 취미로 하라고요? 그냥 정장입고 중소기업에 다니면서 정시출근 정시퇴근, 통장에 몇 십만원 보너스 들어오면 거기에 환호성 지르고, 쉬는 날에도 승진을 위해서 토익학원에 다니고, 그냥 그렇게 살아야 인정해주실 겁니까? 아니면 바깥 분처럼 대기업 임원으로 올라서서 높은 연봉 받으며 떵떵거려야 인정해주실 겁니까? 그게 몸을 세우고 이름을 알리는 길인가요?"


쌤은 숨을 고르고 마지막 한마디를 뱉었다.

"그렇게 살면 재밌습니까? 행복한가요?"


약간 놀라서 쌤을 바라보았다. 쌤이 진심 빡쳤다는 게 느껴진다. 농담 따먹기나 하고, 우리한테는 그림 안 그린다 난리 난리치는 그냥 소심한 남자라고 느껴왔는데. 엄마가 뭔가 말 하려고 하는데 쌤이 다시 말꼬리를 자르고 들어와버렸다.


"어머님. 12월이 되지만 이 아이들에게 2월까지의 달력은 지옥이나 마찬가집니다. 아침 9시부터 밤 10시까지, 잠자는 거 제외하곤 모든 시간을 학원에서 실기에 할애해야 돼요. 다른 친구들은 수능 끝났다고 알바하고 영화보고 놀러 다니는데요. 대학 가서도 계열 중에 등록금 가장 비싼데다 취업이다 뭐다 힘들어서 부모님 눈치 보는데 정작 부모님은 힘든 관문 뚫고 취업을 해도 '돈 못 벌잖아. 다른 거 찾아봐' 하신다구요. 마지막까지 자기 편 이어야 할 부모님이, 주위 친척들 말 나오는 거 창피해서, 부하직원 보기 민망해서, 동네사람들 소문나는 거 무서워서 자기자식을 부끄러워 한다구요? 아이가 보는 만화, 한번이라도 제대로 읽어보신 적 있나요? 제대로 아이가 거기서 어떤 재미를 느낄까 생각해 보신 적 있습니까? 아이와 이야기 할 때 화내지 않고 대화해 보신 적은요? 그래, 대화할 때 아이가 어머님 말에 따르던가요? 왜 아이가 집에서는 말을 않고 학원에서만 자기 이야기들을 쉽게 하는 걸까요?"


엄마는 심히 당황해버렸다. 사실 그렇긴 하다. 엄마도 그렇지만, 특히 아빠는 무슨 말을 해도 안 통하니까. 뭐라고 말을 하든 지금 쌤이 하듯 말을 잘라버리고 아빠 기준만 이야기하니까. 한편으로는 속이 뭔가 후련한 듯하면서도 막 불안하고 그렇다. 아 나중에 집에 가면 엄마가 쌤에 대해 뭐라고 말할까. 아 시바 어떡하지 ㅠㅠ 다시 침묵이 흐르고, 상담실 공기는 아침 눈꺼풀만큼이나 더 무거워졌다. 쌤도 감정을 추스르는 모습이었고, 엄마는 뭔가 답답한 듯 보였다. 마침내 엄마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애써 뭔가 누르듯 목 멘 소리로 쌤에게 말했다.


" 제가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래서 내가 어떻게 해야 되냐고요. 애는 말을 안 듣고, 애 아빠랑도 말 안되고 저는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내려 놓으셔야죠. 뭔가를 얻으려면, 잃으셔야죠. 아이와 같이 생각하고 같이 뭔가 하고싶으시다면, 부모님의 기준을 내려놓으셔야죠. 결국 세상은 등가교환이니까요."


엄마가 의아한 눈을 했다. 선생님이 말했다.

"하가렌을 읽어보세요."

 

 




하가렌: 일본만화 ‘강철의 연금술사’. 필자도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다. 연금술이 보편화 된 중기 산업사회정도가 배경. 같은 값의 무언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등가교환’ 이 연금술의 기초가 된다. 주인공 형제는 천재 연금술사들로, 죽은 어머니를 연금술로 살려내려다 주인공은 팔 한 쪽을, 동생은 몸 전체를 잃었다.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