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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잉각색

오래 살겠다. 이유는 묻지 마라 (정문정)


 

월간잉여가 벌써 12월호를 낸다니, 여름에 잉집장님이 최대한 잡지가 느리게 망하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던 생각이 나 감개가 무량하다. 어쨌든 지나가는 것이다. 견디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소설가 이외수씨가 존버(존나 버티는) 정신을 젊은이에게 시전했는데 나는 우리 같은 잉여들은 악을 좀 더해 씨견(아 씨밬 몰랔ㅋㅋ 견뎌) 정신쯤은 필요하다고 본다. 견디다 보면 의도치 않은 것이 툭 튀어나오기도 하고 아뿔싸 일이 좀 커져버리기도 하고 그러다 보면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죠하고 새삼스럽게 자신도 예측 못한 상황에 대해 변명하고 있게 되기도 할 것이다. 이게 다 살아있으니까 가능한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나도 지금 월간잉여의 정규 필진이 될 판이다. 저도 이렇게 될 줄 몰랐는데 말이죠.


아무튼 다시 돌아와,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지난 해 12월 정기간행물 등록을 했던 <월간잉여>가 한 계절을 돌아와 12월 호를 낸다는 것. 이 대단한 일을 앞두고는 뭔가 엄청 거창한 걸 써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기 때문에 나도 아주 실존적인 질문을 해보려고 한다. 2012년을 마무리하며 잉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잉집장님의 지시까지 있었으니 쿵짝이 맞는 것 같다.

 


왜 살아야 하는가?

대학 잡지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대학생을 많이 만난다. 취기도 없는데 민망하게 몇몇 친구들은 내게 굉장히 심각한 표정으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제가 왜 살아야 할까요?”라고. 너무 휴즈빅자이언트그레이트해서 나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만큼 삶이 팍팍해지고 있다는 증거이고 연말이라 싱숭생숭한 탓도 있겠지만 이런 질문들을 연달아 받으니 처음에는 평소처럼 낄낄대면서 농담을 주워 먹다가 어느 순간 아, 이게 장난들이 아니구나 숙연해졌다. 그러던 중 최근 도쿄대 강상중 교수의 살아야 하는 이유가 출간됐다. 저자는 윌리엄 제임스의 거듭나기개념을 통해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아 고뇌하고 방황한 후에 삶의 새 가치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데 나는 이 메시지가 시대와 불화하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묻는 훌륭한 젊은이에게 영감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이 됐다, 고 말하고 싶지만 더 의아해지고 빡치기만 했다.




김상중 <살아야 하는 이유> (2012, 사계절)




오랜 고민 끝에(사실 그리 오래 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말하면 뭔가 좀 진지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아서 이렇게 써본다) 내 나름의 답을 찾았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딱 준비해 놓고 나니까 더 이상 사람들이 내게 더 이상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답변을 준비한 걸 들켰나? 아깝기 때문에 <월간잉여>에 써야겠다. 잉여된 종이에게는 미안한 마음이 있다. 죽으면 유한킴벌리 사장과 함께 나무를 심겠다.


그 유명한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와 비슷한 문제의식이 있는 말인데, 처음에는 굉장히 중요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을 보다 고차원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주는 것 같아 심각해지고 진지해지는 느낌이다. 대학 새내기 때 소위 운동권선배들은 내게 자주 그런 질문을 하곤 했다. “요즘의 네 화두는 뭐니?” “무엇을 위해 살고 있니?”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을 했더라도 별 의미 없었을 것이다. 어차피 질문자의 의도는 답을 듣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답풀이를 해주는데 있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부끄러운 마음이 돼서 앞으로는 더 생각을 갖고 살아야겠다는 비장한 마음을 먹고는 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질문이 요즘 들어서는 불편하다. 발끈하기까지 한다.

 


수학시간도 아닌데 뭘 자꾸 증명하나

어떤 존재가 존재의 의미를 자꾸 설명해야 한다면, 그것은 이미 무가치한 것으로 잠정 결론이 난 것이거나 낮은 수준으로 여겨지는 것이리라. 유인촌 장관이 서사창작과가 왜 필요해?”하고 물을 때, 면접관이 지원자에게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5분 안에 설명하시오라고 할 때 해명해야 하는 존재들은 검증받으면 살아야 남겠지만 그럴 확률이 별로 없는 전형적인 을의 것들이다. 안쓰럽고 비루한 생이다. 유일하고 희소하고 독보적인 상위 수준의 존재일수록 설명할 필요가 없다. 대통령은 명함이 없다. 오바마는 세계 어디를 다니고 누구를 만나든 저는 유에스에이의 대통령인데요. 흑인 같이 보이겠지만 흑인만은 아니고요. 이번에 재선이 돼서 신나요뭐 이런 말로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오바마는 져스트 오바마니까.






버락 오바마(이미지 출처: 위키백과)




높은 차원의 존재일수록 별 쓸모도 없다. 냉장고로 치면 에너지 효율이 5아주 낮음수준인 것이다. 말도 안 되게 비효율적이다. 그럼에도 존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서 납득시키기가 어렵다. 샤넬백 하나를 6백만원에 사는 사람에게 저기 실례가 안 된다면,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너무나 궁금해 미칠 지경이라서 그러는 건데 도대체 왜 그 돈을 주고 사는 겁니까?”라고 진심을 담아 물어도 구매자는 진심을 다해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다. ‘이건 샤넬이니까요.’ 예술대학에 취업률 지표를 넣어서 부실대 판정을 내리는 교과부에 예술대 학생들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이건 예술인데요!” 같은 맥락이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 대한 정답은 어쩌면 아주 심플할 것이다. 나는 이 대답을 골랐다.

 


이해시키지 않아도 괜찮다

애초에 이해받을 필요가 없는 성질인 것이다. 이해시킬 필요도 없다. 나는 만년필을 쓰고 커피콩을 갈아서 핸드드립으로 마신다. 시계도 찬다. 기능적인 면에서 보면 시간 낭비에 돈 낭비에 쓸 데 없는 짓이다. 친절한 인생설계사가 와서 내 삶을 효율적으로 바꿔준다고 만년필을 볼펜으로 바꿔주고 드립커피는 캔으로 대체해주며 시계는 휴대폰에 다 나와 있으니 없애준다면 나는 그 사람부터 없애고 지옥에 가서 유한킴벌리 사장과 함께 나무를.


생각하면 꾸준히 나의 쓸모 있음을 증명하며 산 생()이다. 사람들은 너무 창의적이지 못하다. 다들 나만 보면 왜 그렇게 쓸 데 없는 짓을 하냐?”고 토씨도 안 틀리고 말했다. 어릴 때는 여자지만남자보다 못할 것이 없다고 부모나 선생님을 설득했고, 중고교 시절 책을 읽을 때는 시험에 나오는 것이 아니면 쓸 데 없다고들 하고, 사회학과에 입학했더니 거긴 나오면 뭐 하냐는 질문만 주구장창 들었다. 이제는 패기 돋게 아무 것도 안 하()면 어때?” “쓸 데 없으면 어때?”라고 대답할 준비를 했더니 더 이상 사람들이 묻지 않는다. . 이것도 준비한 걸 들켰나? 포커페이스가 되고 싶다.


그러니까 1년 전으로 돌아가서, 잉집장이 월간잉여를 출생등록하며 이것이 그냥 근근히 이어만 지기를 바라는 마음과 최대한 늦게 망해주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돌아가서, 우리 엄마가 4대 독자인 내 남동생을 낳고 건강히만 자라라고 했던 22년 전으로 돌아가서, 살아야 하는 이유와 그 답을 이어 붙이겠다. 사회는 무책임하게도 자꾸만 개인에게 존재의 가치를 스스로 증명하라고 떠넘기고, 개인은 자꾸만 새파래져서 우물쭈물 답을 찾고 있는데 그러지 않아도 충분하다고 전하고 싶다. 글이 길었지만 결국 쓸모없는데도 살아있으니 더 대단한 잉여들이니까 최대한 오래오래 살아달라는 말이다. 나도 오래오래 살겠다. 씨견!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