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각잉각색

수요일 밤의 생각(글_진공)

아침 6시 반, 공습경보를 알리는 사이렌이 울렸다. 잠과의 전쟁을 알리는, 고막이라도 찢을듯한 알람소리의 패기. 눈두덩이부터 발끝까지 끈덕지게 달라붙는 졸음을 겨우 떨쳐내기도 전에 시간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씻기 싫은 듯 몸을 씻고, 옷을 먹고, 아침밥을 입는 둥 마는 둥 하며 대문을 나서, 뛰는 듯 걸어 지하철역에 도착할 때까지 시간과의 전쟁은 이어졌다. 지하철에 오르는 순간부터는 출근길 전쟁이 시작되었고, 출근길 전쟁은 다시 생존 전쟁으로, 그리고 퇴근길 전쟁으로...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어찌됐든 전쟁은 하루 종일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 모든 전쟁에서 겨우 살아남아 무사히 집에 귀가했지만, 내게 개선장군 같은 위풍당당함은 찾아볼 수 없다. 전쟁의 상흔을 씻어내기 위해 들어간 화장실 거울 앞에 서 있는 초라한 패잔병의 모습. 어깨는 땅에 닿을 정도로 축 늘어졌고, 피로에 찌든 얼굴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다크서클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살아 돌아왔다는 안도감도 잠시 뿐.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니 육신은 한여름 캐러멜 녹듯 찐득찐득하게 침대에 눌어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식은 하루 24시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또렷해진다. 낮에 과다 투여한 카페인 때문일까? 내가 커피를 많이 마신 건, 삶의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나에게 커피란? 마린의 스팀팩과 같은 것. 그러나 마린과 다르게, 내게는 메딕이 없다는 사실이 심장을 콕콕 찌른다. 커피를 줄여야 할까? 휴대폰 스케줄러를 보며 내일 처리해야할 일들을 하나씩 점검한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집에 귀가하기까지의 일정을 머릿속에 정리한다. 내일의 전쟁에 대비하여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어느 새 잠이 들고, 잠이 들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다시 전쟁이 시작되겠지?

 

, 한숨이 마치 담배 연기처럼 퍼져 올라 공간을 뿌옇게 메우자 대략 정신이 멍해진다. 잠이 들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다시 전쟁. 전쟁이 끝나면 잠이 들고, 잠이 들면 아침이 오고, 아침이 오면 다시 전쟁... 수십 번을 넘게 뒤척거리다, 이게 다 커피 때문이다!라고 중얼거리지만, 실은 어쩌면 이 밤만이 유일하게 내가 진정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공간이기 때문에, 그래서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닐까하고 실없는 생각을 한다.




그림 slump



다행히도 하루만 더 버티면 금요일, 내게 금요일은 24시간의 제한된 자유가 주어지는 날. 나는 내가 이틀 뒤 잠시나마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알기에, 내일 반복될 전쟁 같은 삶이 상처가 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금요일에도 출근해서 일을 하는 가족들의 상처는 대체 어느 정도일까. 끝없는 자기소외가 인간 본연의 삶이 아닐 텐데.

 

끊임없이 꼬리를 무는 생각의 파편들로 인해, 이 밤의 끝을 잡고 잠을 이루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고요한 밤의 평화로운 정적 속에서도, 시간은 결코 관용을 베푸는 법이 없다. 그래서 매번 수면에 대한 저항은 결국 맥없는 항복으로 끝이 난다. 차라리 잠자는 동안 악몽을 겪지 않길 바라는 편이 낫다. 최악은 아마 북한과 전쟁이 터져, 전쟁터에 끌려가는 꿈을 밤이 새도록 꾸는 것일까?

 

어쩌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억지로 등 떠밀려 세상과 마주한 순간부터 전쟁은 시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때 난생 처음 보는 끔찍한 전쟁터에서 느낀 두려움 때문에, 갓난쟁이였던 난 그렇게 서럽게 울어댄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길고도 짧은 오늘 밤에도, 나는 낮과 밤, 전쟁과 평화의 촘촘한 경계를 오간다.



※ 월간잉여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