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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논단

집합적Collected 기억에서 집단적Collective 기억으로 (고원석)

집합적Collected 기억에서 집단적Collective 기억으로*

- 동시대를 사는 20대들에게 전하는 말


 

어찌어찌 살다 보니 20대를 훌쩍 지나버린 아저씨 나이의 반열에 접어들었다.(이 말을 쓰면서 어찌나 마음이 아픈지) 20대라는 세대와의 거리를 별로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왔지만, 이제는 어쩔 수 없이 거리의 20대들을 보며 평가와 교훈의 덕목을 떠올리는 기성세대에 편입되어 버린 것이다.


<88만원세대> 출간 이후 한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촉발된 20대에 대한 담론이 수년의 시간을 지나며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져 왔다. 흘깃흘깃 그 내용들을 지켜봐왔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열의는 부족했기에 나 역시 20대에 대한 지극히 보편적이고 피상적인 시각으로만 그들을 보아왔던 것이다. 그런 나를 가리켜 누군가는 꼰대정신이 철저하게 박혀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사실 그 말에 적잖은 충격을 느꼈다. 내가 보기엔 그 사람이 나보다 몇 배는 더 꼰대였는데, 그런 사람이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도 충격이었다. 그리고 내가 20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의 제한된 기억으로 대충 훑어 보건대 요즘 20대를 바라보는 시각들은 대충 다음과 같이 나눠진다. 일단 무조건 나가서 싸우라는 부추김론, 취직도 못하고 학자금 대출에 전전긍긍하는 그들을 처연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동정론, 혹은 너희들이 사회적인 메시지를 내지도 못하고 무력하게 당하고만 있다는 질타론, 너희는 아직 어리고 개발ㆍ 진화시켜야 할 부분들이 많으므로 열심히 자기개발을 시도해야 한다는 처세술론(가장 질적으로 좋지 않은 경우), 혹은 너희들의 아픔을 공감하며 그것을 위로해주고 싶다는 간호론. 이 모든 시각들은 대체적으로 지금의 20대를 하나의 특정 세대로 묶어놓고 있다는 기반 위 존재한다. 20대를 하나의 세대 범주로 상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20대들 또한 스스로를 특정 세대로 간주하며 그들의 부모세대인 386 세대로부터 유용당해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기도 하다. (<88만원 세대>에서는 기성세대가 20대의 목을 조르고 있는 형국이라고 표현했다.)

 

세대의 개념은 전통적으로 어떤 역사적 기억의 공유를 통해 범주화된다. 예를 들어 386세대는 전두환 정권의 독재시대에 대학을 다녔던 80년대 학번들의 반항적, 투쟁적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내가 속한 X세대*는 90년대에 학교를 다니며 즐겼던 새로운 대중문화에 대한 환호의 기억을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고통을 공유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들에게 특정 세대의 범주를 적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예를 들면 20여 년 전인 1990년대 출생이라는 조건 만으로?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지금 이들의 고통은 지극히 집합적(collected)으로 관찰되는 현실이다. 사회적 약자의 위치에서 심각한 고통과 불안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명확하다. 이들은 1천만 원에 달하는 등록금으로 인한 학자금 대출의 압박에 불안한 고용과 저임금 노동으로 이어지는 현실적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고 있다. 사회 진출은 유예되고 있으며 애매한 주변인의 위치에서 대기할 것을 요구받는다. 사회는 영원히 사회에 편입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만성적 불안을 심어주며 제도에 순응할 것을 요구한다. 이에 대한 20대들의 반응은 - 물론 사회에 저항의 메시지를 던진 용감한 20대들도 많이 있지만- 대부분 사회에 순응하고 현실을 수용하는 태도가 더 많은 것으로 내 눈에는 보인다. 기존의 386세대들이 그 윗세대에 철저히 반항적인 자세로 일관할 수 있었던 것에 반해 지금 20대에게는 그럴 정도의 분명한 어젠다도 없는 것 같다.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문제가 있다. 20대의 불안은 386을 비롯한 기성세대가 의도적이고 작위적으로 20대를 착취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과연 보편타당한 것인가? 그보다는 전지구적 자본주의의 심화와, 강화된 자본주의가 갖는 승자독식의 배타성이 20대들을 약자의 자리로 내몬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20대의 고통은 20대들의 문제임과 동시에 소수가 대부분을 독점하는 자본주의의 권력체계에서 하부로 밀려난 사회적 약자들의 보편적 문제일수도 있는 것이다.


20대의 고통과 불안을 무엇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 결국 <88만원의 세대>에서 결론지은대로 결국 이들이 짱돌을 들고 거리를 나서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이라는 데에 큰 이견은 없다. 가능한 다양한 방법들을 동원해서 자신들의 현실을 알리고 부조리하게 억압을 가하는 모든 제도들에 저항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 자신들을 드러낼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을 언급하자면, 그 저항과 투쟁은 20대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배타적인 사회구조에서 공존하는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게 균등한 기회와 배분이 주어져야 한다는 보편타당한 윤리영역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나는 20대들이 단지 자신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포함한 다수의 사회적 약자들을 같이 고려하고 같이 행동했을 때 더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강력한 힘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88만원세대 (2007, 레디앙)



결국 집합적(Collected) 기억은 집단적(Collective) 기억이 되었을 때, 험난한 정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보편타당성의 힘을 갖게 될 것이다.

 





*집단적Collective 기억으로: 정용택, <자기를 이야기하는 청(), 세계와 적대하는 인간>에서 인용

*X세대: 엑스세대와 관련하여 쓴 아래의 글은 월간 아티클 20129월호에 게재되었다.

7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대학을 다닌 우리를 사람들은 엑스세대(X Generation)라고 불렀다. 당시에는 크게 의미를 찾지 못했으나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가 왜 그렇게 불리웠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우리세대는 앞서 한국사회 전반을 흔들었던 386세대의 정치적 입장과 어느 정도 교집합을 공유했으나 그들의 밀도높은 이념적 스펙트럼의 틀 안으로 들어가기는 어려웠다. 선배들로부터 전수받던 이론적 학습기회 대신 전혀 새로우면서도 세련되었던 대중문화 코드를 통해 사회를 읽어나갔다. 서태지로 대표되는 한국대중문화의 새로움도 신선했지만 너바나에서 시작해서 스매싱펌킨스와 라디오헤드로 이어지는 얼터너티브락의 세례는 우리에게 최상의 만족감을 주었다. 그들중 상당수가 지금 미술계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는 작가들이 되어있는 것 같다. 그들이 성장하던 시절 내재된 감수성들이 그 세대 작가들의 특수한 미학으로 승화되어 작품으로 표현된 시기는 대략 90년대 후반 이른바 대안공간들의 출현시점과 겹친다. 그들의 작품은 그 이전 한국의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을 주도했던 60년대생 작가들과 분명히 달랐다. 이전세대와 대립항을 형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뭐라고 특징짓기 애매한 나름대로의 방향으로 달랐다. 한국미술계의 다변화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 월간잉여 12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