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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법은 멀다(글_김형욱)

흔히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라고 한다. 같은 뜻인 법원권근(法遠拳近)이란 한자어도 있고, 비슷한 영어 속담(Where drums beats, laws are silent)도 있는 걸 봐서 유래는 상당히 오래 됐다. 싸울 일이 없다 보니, 더욱이 조직폭력배랑 접할 일도 없어, 주먹이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법이 현실과 먼 것만은 틀림없다.

 

더욱이 범 구직자, 잉여라면 법은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특별이 법을 운운할 만큼의 돈이나 사회적 지위가 없다. 고시생들의 수험서나 법정드라마 속에서나 봄직한 일이다. 알게 모르게 잉여에 적용되고 있는 법 따위, 하나 같이 유명무실하거나 불리하기 짝이 없다.




영화 <부러진 화살>(2011)의 한 장면



올해 들어 기본시급이 4580원으로 올랐다. 몇 십 원 올랐다고 한다. 법치국가 대한민국에서 대부분의 비잉여 국민은 이 같은 혜택을 받는다. 하지만 현실 속, 구직을 겸할 만한 일거리는 아직 법과는 거리가 멀다. 대표적인 게 고시원 총무. 지방에서 구직활동을 위해 서울에 올라온 고시촌 사람들이 처음 접하게 되는 모집공고가 고시원 총무다. 한 달에 40~60만원 정도 주고, 고시원 자리도 준다. 하루 8~9시간 근무에 짬짬이 공부할 시간이 있어 매력적이다. 하지만 이를 시급으로 환산하면 약 1900. 2000원도 안 된다.

 

탈잉여하고자 대학원에 간 잉여도 상황은 비슷하다. 등록금이야 부모가 대 주신다고는 하지만 생활비는 어느 정도 자체 조달해야 면이 선다. 교수가 주는 이런저런 소일거리, 감지덕지다. 하지만 이걸 시급으로 환산한다면 어떨까. 워낙 제각각이라 통계를 낼 순 없다. 하지만 턱없이 높은 등록금에 비하면 보잘 것 없다는 게 많은 경험자들의 증언. 이런 건 선배나 지인이 추천해 준 일자리도 마찬가지다.

 

아는 형이 사업을 시작했어. 너 생활비 필요하니까 일 도와주면서 공부해.”

물론 아는 형이 김택진 엔씨소프트 창업주였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개는 어렵다. 일은 생각보다 많고, 돈은 말한 것보다 적은 게 보통이다. 돈 못 받아도 하소연하기 참 애매하다. 동병상련이랄까. 다 같이 어려운 잉여 아니었던가.

 

아르바이트비 체불도 적지 않다. 노동부에 진정서 내면 25일 내로 돈을 준단다. 물론 고용주가 배 째라면 소송을 걸어야 하는데 이게 검찰 송치까지 두 달 걸린단다. 대개는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이것저것 챙겨야 하는 것에 대한 비용, 길게는 3달 가량의 맘고생까지 보상받지는 못한다.

 

합법의 틀 속에 있는 것 같지만 인턴도 편법이다. 최근 수 년 새 경험치를 쌓아준다며 2~6개월 장기 인턴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어떤 기준으로 몇 명을 뽑겠다고는 말 안 하지만 평가를 거쳐 정규직 전환도 해 준다며 삐끼질을 해 댄다. 고용률을 높이려고 인턴 채용에 보조금을 주는 정부, 싼 맛에 인력 부려먹으려는 기업의 윈윈 전략이다. 몇몇 증권사가 인턴에 상품 영업을 시킨 게 금융감독원에 걸렸다. 다단계가 따로 없다. 하지만 잉여는 처량하다. 그나마라도 없으면 이력서에 쓸 게 없다. 오늘도 어색한 정장 입고 가서 써 달라고 조른다.

 

잉여들이여, 너무 푸념하지는 말라. 잉여의 삶을 청산한다 해서 법이 가까워지는 건 아니니까. 어차피 똑 같이 그렇고 그런 인생이니까. 놀랍게도 한국에도 법정 근로시간이란 게 있다. 최근에 알았다. 40시간. 5일 기준 하루 8시간에 야근 12시간(하루 2.4시간). 하지만 어떤 사기업이 하루 8시간 일하나. 아니 야근 포함 10시간 반 밖에 안 일하나. 참고로 현재 나의 근무시간은 주 6, 하루 12시간 정도다. 물론 중간중간 농땡이도 친다. 하지만 이 정도는 복지로 생각해 달라. 야근 수당은 월 3만 원 정도다. 어찌 됐든 법은 아직 멀고도 멀다.

 

얼마 전 미국 변호사가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강연을 했다. 미국 진출 땐 미국 노동법이 엄청 세니까 조심하라고 했다. 사내 차별이 있거나 노동시간을 어기면 어김없이 소송이 들어온단다. 지면 막대한 손해배상을 물어야 한단다. 미국 진출을 준비하는 기업인 입장에선 모르겠지만, 난 그저 부럽다.







※ 월간잉여 7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