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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생대회 후기 및 세빛둥둥섬 DISS(글_이현석)

일요일이면 끝없이 잉여로운 낮잠으로 일주일의 피로를 푸는 필자가 오후 3시라는 애매한 시각에 집을 나선 것은 <월간잉여>(이하 <월잉>)의 정모로 기획된 사생대회에 참여하기 위함이었다. 따사로운 햇살을 맞으면서 행사장소인 세빛둥둥섬에 조금 늦게 도착하니 벌써 10여명의 사람들이 다소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모여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너무들 열심히 그리고 있어서 인사할 여유도 없이 주섬주섬 자리를 잡고, 일단은 집에서 미리 챙겨간 <월간미술> 5월호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간단한 구상조차 종이로 옮기지 못하는 중증 화치(畵痴)인 탓에 괜찮은 그림이라도 찾아서 베낄 심산으로 넣어 둔 것이다. 사생대회의 주제는  '전쟁'이었는데, 눈을 부릅뜨고 잡지를 샅샅이 뒤져서 전쟁의 상처와 관련이 있을 법한 사람의 표정을 추상적으로 표현한 조그만 그림을 겨우 찾아 베껴 그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허접하게 그린 터라 20분도 안돼서 다 그렸는데, 원작품을 그린 화가에게 미안할 정도의 작품이 나왔다.

이날 정모 행사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되었다. 다들 그림을 빨리 그려서 시간들이 많이 남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보물찾기 시간에는 잉집장이 한눈 판 사이에 통합진보당 경선부정에 비견되는 부정뽑기(?)가 이루어지는 바람에 가위바위보로 급 훈훈하게 마무리되어 순서가 더더욱 빨라졌다. 그 덕에 조금 이른 시각에 모두들 치맥을 하면서 각자 자기소개 겸 작품소개를 진행하였다. 작품들 중에는 정말 수준급의 작품들도 여럿 있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였다. 왜 이렇게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들이 많은지는 참 궁금한 일이다. 시상식이 끝난 이후에는 치맥을 계속 즐기면서 서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자리가 계속되었고, 저녁 8시경에 반포대교에서 내뿜어지는 분수를 보면서 해산했다. 이 정도가 이날 정모에 대한 간략한 정리라 할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이날 <월잉> 정모에서 얻은 수확은 크게 3가지 정도였다. 첫 번째는 필자의 미술 실력에 대한 열등감이 아주 조금(!)이나마 덜어졌다는 점이다. 심사가 끝나고 잉집장님과 구구킴님이 내가 그린 허접그림에 대하여 이야기하셨는데, 정말 의외로 좋게 봐주신 것 때문이다. 구상과 표현은 그런대로 좋았는데, 얼굴의 음영이 방사능 경고마크와 비슷하게 구성되었으면 우승후보에도 오를 수 있었다는 취지의 말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역시 작품보다 해석이 중요한 추상미술은 위대한 것 같다. 



내가 그린 나의 그림





이것보다 조금 더 진지하게 얻은 수확은, <월잉>의 존재이유, 가치에 대하여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점이다. 사실 처음 <한겨레>에서 잉집장 인터뷰를 처음 접했을 때만 하더라도  '이제 별놈의 잡지가 다 나오네' 하는 수준의 인식 밖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이후에 온라인으로 기사를 읽어보고 또 오프라인으로 받아보면서 느낀 점은 <월잉>이 단순한 잉여의 집합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사실 <월잉>과 비슷한 코드로 젊은이들의 잉여감각을 자극시킨 매체들은 종종 있었다. 따지고 보면 <디씨>니 <오유>니 하는 것도 잉여들이 시작한 것들 아닌가. 하지만 <월잉>에는 분명 이들과는 다른 점이 있다. 단순히 잉여로움에 대한 유희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세대가 가지는 문제의식을 다양한 시각에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때로는 젊은 잉여를 하찮게 여길 법한 주류권력의 입장에서는 <월잉>이 불편하고 불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것이고, 이 점에서 바로 매체로서 <월잉>이 가지는 건강함이 나오는 것이다


하찮은 잉여들의 집합이 동시에 건강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수 있는 이유는 무엇에 있을까. 잉집장의  '위대한 영도력'때문일 수도 있고, 독자들의  '집단지성'때문일 수도 있지만, 결국에는 <월잉>과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는 잉여들의 건강함에 있지 않나 생각된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번 정모에서 만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느낀 구성원의 다양성과 온건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비판의식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앞으로 <월잉>이 더 성장하기 위해서 긴장감 있게 챙겨야 할 요소가 아닌가 생각되었다.

그리고 조금 뜬금없기는 한데, 정말 개인적으로 느낀 이번 정모의 또다른 수확은 드디어 건축계 잉여물의 큰형님이신 세빛둥둥섬을 직접 보았다는 것이다.




사진 잉집장





사실 세빛둥둥섬이야 말로 초특급 잉여이다. 그래서 처음에 정모장소가 여기로 정해졌다고 들었을 때,  '건축은 인간의 삶을 담아내야 한다'는 건축원리를 직관적으로 파악하신 잉집장의 놀라운 센스에 정말 감탄했었다. 세빛둥둥섬을 둘러싼 여러 문제점은 이미 언론을 통해서 많이 다루어졌지만, 잉집장의 요청에 의하여 이공학 측면에서의 문제점은 여기에서 한번 짚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아 적어본다.
우선 가장 큰 골칫거리는, 세빛둥둥섬과 같이 물 위를 떠다니는 형태의 구조물이 한강의 특성하고는 전혀 어울릴 수가 없는 조합이라는 점이다. 중고등 시절 지리시간에 잠시 배우고 넘어간 하상계수(河狀係數)를 기억하시는가. 하천에 물이 가장 적게 흐르는 양과 가장 많이 흐르는 양의 비율을 말하는데, 한강의 경우 1:400 정도 된다. 외국 주요 하천의 하상계수가 1:10에서 1:30 정도인 점을 생각하면 한강의 경우 여름에 극단적으로 많은 물이 흐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여름철 집중호우에 의한 것인데, 최근 여름철 날씨의 경향이 장마가 없어지고 게릴라식 호우가 늘어나는 점을 감안하면 6-9월에는 섬의 거동이 근본적으로 심각하게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세빛둥둥섬을 강력히 추진하는 쪽에서는 외국의 사례를 잘 들먹이던데, 애시당초 외국의 하천과는 다른 조건에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보다 더 심각한 문제점은 세빛둥둥섬의 입지와 형상이 동일한 홍수조건에서도 더욱 피해를 악화시키는 방향으로 계획되었다는 점이다. 섬이 위치한 곳은 하필이면 서울시 지도를 펼쳐볼 때 한강이 거의 직각에 가깝게 굽어지면서 강물의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는 지점이다. 따라서 급격한 물살로 섬 자체가 전복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또한 섬이 어떻게 보면 급류가 흘러갈 때 예상치 못한 장애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에 추가적인 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리고 서울시 디자인 전도사 오세훈 전 시장의 취향에 맞게 유려한 곡선으로 설계된 (마초적인 공학자들이 잘 쓰이는 표현으로는, '섹시하게 설계된') 섬의 형상 역시 홍수시에는 위험하게 작용한다. 그 곡선의 형상이 대부분 강물의 흐름에 거스르는 방향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에 섬이 둥둥 뜨게 되는 경우 와류(渦流, 소용돌이)를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와류는 주변의 물을 강력하게 흔들어 버리는데, 이 경우 섬뿐만 아니라 주변의 한강제방 역시 크게 손상을 입어 추가적인 범람이 일어날 수 있다. 이외에도 섬으로 건너는 다리 난간의 부실이나, 섬 위의 건물의 에너지 효율이 형편없다는 점 등의 몇 가지 이공학 측면의 문제들이 더 있다. 확실한 것은 섬 자체가 잘못 설계되었는데, 나머지가 잘 되어있을 리는 만무하다는 점이다.

세빛둥둥섬 덕분에 후기가 조금 길어지기는 했는데, 결론을 이야기하자면 정모를 통하여 필자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수확들을 거두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집으로 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앞으로 단순한 구독과 후원을 넘어서 <월잉>에 보다 더 높은 수준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바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이 후기가 그 첫 단계가 되었으면 한다.








※ 월간잉여 6월호에 실린 글입니다.